트라우마의 소용돌이

PTSD가 일상을 지배하다.

by 낙산우공

PTSD라는 말이 아이들 사이에서 유행한다는 사실을 몰랐다. 오랜만에 잠시 학교에 들렀던 아이가 교문으로 들어가기 전에 이 말을 쓰길래 어떻게 이런 전문적인 용어를 알고 있는지 의아했다. 그리고 알게 되었다. 아이들 사이에서 스트레스를 과중하게 받는 상황일 때 흔하게 쓰는 말이란 것을…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을 알게 되고 나는 망연자실했다. 아이들의 유행어는 의학적 의미와 다르게 쓰이지만 내 아이는 정확하게 사용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내 아이는 압도적인 PTSD 환자였다.


PTSD(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는 말 그대로 트라우마(외상)를 겪은 후에 오는 스트레스 장애를 말한다. 트라우마는 정신적, 신체적 손상을 모두 포함하는 개념이다. 보통 트라우마라고 하면 전쟁이나 지진과 같이 불가항력적인 재난재해를 겪은 사람들에게 발생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트라우마는 그것을 겪은 사람의 조건이나 환경에 따라 다를 수 있는 것이었다. 즉 어떤 이에게는 가벼운 충격일 수 있는 게 좀 더 예민한 사람에게는 압도적인 것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처한 상황에 압도당했는지 여부였다.


아이의 학업중단숙려제를 신청하기 위해 아이와 함께 위클래스 상담실을 찾았을 때 담당선생님이 PTSD 간이검사를 제안했다. 학교폭력 피해학생들에게 자주 나타나는 증상이기 때문에 권한 것인데 검사결과는 가히 충격적이었다. 좀 더 심층적인 검사가 필요하다는 생각에 숙려제 기간 동안 주 1회 받아야 하는 상담에서 다양한 관련 검사를 진행했다. 추후에 부모면담을 통해 전달받은 결론은 놀랍게도 내 아이가 굉장히 많은 트라우마 경험을 갖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청소년 우울증은 대부분 불안(공황) 장애를 동반한다. 우울감이 깊어 공황이 오거나 공황이 자주 오다가 우울증으로 발전하는 등 아이들마다 증상의 발현과정이 다르지만 언제나 짝을 이룬다. 내 아이는 거의 동시이긴 했지만 전자에 가깝다. 우울감이 깊어진 주된 이유가 학교폭력 피해라는 건 알았지만 아이의 증상은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만으로 설명이 안 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게 항상 답답했는데 원인은 PTSD였다. 병원에서도 그 점을 간과했는데 학업중단숙려제를 신청하며 상담센터를 바꾼 뒤에야 원인을 알게 된 것이다.


아이는 감정의 기복이 있었고 우울감이 깊어질 때는 자주 분노를 표출했다. 그리고는 기절하는 일이 발생하기 시작했다. 그 빈도가 점점 잦아졌고 공황발작 증상과는 좀 다르다는 생각에 병원에 문의했지만 속 시원한 답을 얻지 못하던 터였다. 그저 공황발작 환자 중 20% 정도가 졸도하는 경우도 있다는 대답뿐 원인도 치료방법도 알지 못했다. 그런데 PTSD 판정을 받고서야 아이의 평소 증상이 거의 완벽하게 설명되었다.


트라우마를 경험한 PTSD 환자들은 유사한 상황에서 과거의 트라우마가 떠오르면서 신체적으로 과도한 반응이 나타난다. 트라우마 경험이란 대개 자신의 통제능력을 벗어나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압도당하는 경험을 말한다. 예컨대 허허벌판의 초원 위에서 사자와 마주쳤다고 치자. 인간은 사자와 맞서 싸울 힘도, 사자를 피해 도망갈 힘도 없다.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일 때 당연히 처음에는 과도하게 긴장(각성)하게 되지만 결국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해리(졸도) 상태에 돌입하는 것이다.


해리상태는 죽음을 마주했을 때 기절하거나 땅에 머리를 처박는 초식동물의 행동과 닮아있다. 그 행동을 돌이켜 보니 아이가 어릴 적 나에게 심하게 혼이 날 때에도 그랬다는 것이 기억났다. 당시에 나는 아이가 과하게 버릇없는 행동을 할 때 가끔씩 무섭게 혼을 낸 적이 있다. 회초리를 든 적도 있다. 그런데 내 아이는 그 상황에서 어쩔 줄을 몰라했다. 나는 당시에 아이의 그런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다. 잘못을 따져보고 저항하거나 승복해야 하는데 아이는 그저 어쩔 줄을 몰라했고 그래서 나는 더 화가 났다. 그때 아이는 아빠의 무서운 표정만으로도 압도당했던 것이다.


어린아이는 그럴 수 있다는 걸 뒤늦게 알았다. 트라우마 연구의 세계적 권위자인 반 데어 콜크 박사의 강의와 책을 통해서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아이는 어릴 적 학교에서 아이들에게 집단 괴롭힘을 당했을 때뿐만 아니라 아빠의 무서운 훈육에서도, 시내에서 길을 잃어버렸을 때에도 모두 강렬한 트라우마를 경험했다는 사실을 한심하게도 이제야 알게 되었다.


인간의 자율신경계는 적정한 범위에서 긴장과 이완을 한다. 그 범위를 넘어갈 때 나타나는 증상이 과각성과 해리였다. 아이는 PTSD가 깊어져 평소에도 늘 과각성 상태였던 것이다. 즉 과도하게 긴장된 상태로 하루를 보내니 에너지가 남아날 수가 없었다. 심지어 잠을 잘 때조차 편안한 수면을 기대할 수 없었고 그래서 아침마다 경직과 마비가 왔다. 과각성 상태에서 트라우마 경험이 상기되면 아이는 분노를 표출했고 그 끝은 기절로 마무리되었다. 우울증 진단을 받고 약을 복용하면서 일상이 무너지는 경험을 한 아이는 과거의 트라우마가 자신의 삶을 무너뜨렸다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었던 것이다.


과거의 끔찍한 기억이 소환될 때마다 아이는 반복적으로 분노를 쏟아냈고 매번 반복되는 아이의 질타에 우리 가족은 지쳐가고 있었다. 그걸 “트라우마의 소용돌이”에 빠진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말했다. 트라우마의 소용돌이에 빠진 환자는 반복적으로 같은 이야기를 내뱉고 그런 행동이 주변사람들을 지치게 해서 결국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하는 일이 흔하다는 거였다. 그래서 PTSD 환자의 공통적인 고충은 고립감이었다. 그리고 주변사람들에게서 가장 많이 듣게 되는 말이 “피해의식”이라고 했다. 우리 아이가 가장 싫어하는 말이 “피해의식”이었다. 나는 자주 아이에게 그렇게 말했던 것이다. 나는 정말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제라도 내가 아이를 더 깊이 이해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고 그 원인에 적합한 상담치료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아이는 기초적인 트라우마 상담을 10회 진행한 후 전문적인 트라우마 심리상담 치료를 받고 있다. 처음으로 상담에 대한 아무런 거부감 없이 5회 차를 마쳤다. 앞으로도 오랜 시간 치료를 해야 할 것이지만 나는, 우리 가족은, 아이는 이제 아주 조금씩 희망을 갖게 되었다. 원인을 알았고 오해를 풀었으며 치료방법을 이해했기 때문에 우리는 조금씩 나아가고 있다. 아이의 분노는 전에 비해 한결 강도와 빈도가 줄어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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