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 고르기

한달살이를 다녀오다.

by 낙산우공

처음엔 휴학 아니면 자퇴 밖에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다. 학교에 가지 못하는 아이가 학교를 다닐 수는 없었다. 2년 넘게 입시준비에 매진하여 합격한 학교였지만 출석일수를 채울 수 없다면 멈추거나 그만두는 수밖에 없다. 자퇴보다는 휴학을 선택하려 했지만 결국 자퇴를 하게 될 거라 생각했다. 1년 동안 함께 생활했던 동급생들과도 어울리지 못하는 아이가 한 살 아래의 후배들과 남은 2년을 함께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을 떨치기 어려웠기 때문이다. 그렇게 절망스럽지만 최악의 사태를 각오해야 했다.


아이는 쉬어야 할 때였다. 학업이라는 루틴한 일상을 소화하기 어려웠다. 특히 대학입시 준비가 본격화되는 2학년의 분위기를 감당할 수는 없었다. 학업을 계속하기 어려운 아이들을 위해 학업중단숙려제라는 제도가 있었지만 주로 자퇴의사를 밝힌 아이들에게 한번 더 생각할 기회를 주는 목적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우리 아이와는 경우가 달랐다.


그런데 아빠가 휴직하겠다고 선언하자 아이는 휴학을 거부하고 학교를 다시 다녀보겠다고 말했다. 2주가 넘도록 하루도 등교하지 못했지만 아이는 학교를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그 마음을 외면하는 순간 아이는 더 깊은 나락으로 떨어져 버릴 것 같았다. 아니 그랬다. 아이는 몸과 마음이 망가졌지만 미래를 그리고 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휴학이나 자퇴라는 현실을 아이는 감당하기 어려워 보였다. 그러나 아이의 몸은 학교를 거부하고 있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순간 나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멈추어야 하는 것은 분명했지만 휴학이 아이에게 줄 충격이 너무 커 보여 일단 한 달이라는 시간을 벌었다. 4월 한 달간 학업중단숙려제를 신청하고 아이와 거제로 한달살이를 떠났다. 아이는 서울이라는 도시를 힘겨워했고 집과 주변동네(학폭 가해자가 살고 있는)를 불편해했다. 되도록 집에서 멀리 떠나고 싶어 했고 바다를 보고 싶어 했다. 학업중단숙려제는 주 1회 이상 상담을 받으러 서울에 와야 했기 때문에 제주로 갈 수는 없어 남해를 선택했다.


한달살이를 떠나기 전에도 집에 박혀 답답해하는 아이를 위해 종종 바다에 갔다. 서해로 동해로 남해로 종횡무진 다녔고 뻥 뚫린 곳을 찾아 한계령 대관령도 여러 번 찾았다. 차로 갈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을 샅샅이 뒤지다가 해발 천 미터가 넘는 조경철천문대에도 여러 번 올랐다. 그런 곳에 가면 아이는 비로소 숨을 쉬었다. 얼마나 가슴이 답답하면 그럴까 하는 생각에 닿으면 나는 또 먹먹해졌다. 주말 정오가 다 되어서 눈을 뜬 아이는 어디라도 나가지 않으면 우울감을 견디기 어려워했다. 아이와 함께 다닌 길이 6개월간 1만 5천 킬로미터가 되었다.


거제 한달살이는 절반의 성공이었다. 처음부터 아무 기대를 하지 않고 떠난 길이었다. 집에서 엄마나 누나와 부딪치는 걸 힘들어했고 집이라는 공간도 불편해했으며 사람으로 가득 찬 서울거리도 싫어했기 때문에 그저 그 환경에서 벗어나는 게 일차 목표였다. 너무 외딴 시골에 가면 삼시세끼 챙겨 먹기도 어려울 것 같아 옥포 대우조선(한화오션?) 근처에 숙소를 잡았다.


아이는 하루종일 숙소를 벗어나지 않은 날도 많았고 여전히 감정기복이 있었지만 집에서보다는 한결 좋아졌다. 나는 직접 장을 봐서 아이의 식사를 챙겨주기 시작했다. 집에서도 배달음식을 자주 먹었지만 여기서만큼은 냉동식품일지언정 손수 아이에게 밥상을 차려주었다. 아이는 서툰 아빠의 김치찌개를 좋아해 주었다. 같이 밥을 먹고 같이 영화를 봤으며 같이 야식을 사러 나갔다. 그렇게 3주 넘는 시간을 온전히 둘이서만 보냈다.


한달살이 동안 해금강, 외도보타니아, 남해, 한산도를 둘러보았고, 멀리 전북 부안의 할아버지 산소에도 다녀왔다. 아이는 여전히 불안정할 때가 많아 일정을 취소하고 돌아온 적도 있고 아침부터 계획을 전면 취소한 적도 있었다. 부안에 성묘를 가면 항상 들르는 갈치요리 전문점이 있는데 식당 앞에 주차를 하려다가 갑자기 돌아가고 싶다고 해서 왕복 8시간 동안 쫄쫄 굶고 운전만 하기도 했다.


거제 한달살이에서 아이는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학교에 다니는 것조차 힘겨워하는 아이가 내년에 치러질 대학입시에 도전한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게다가 벌써 친구들보다 한참 뒤처졌다고 스스로 몹시 불안해했다. 나는 일 년 쉬고 도전해도 되고 재수, 삼수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 너 마음먹기에 달린 거라고 설득해 보았지만 아이는 귀담아들으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아이와 내가 찾은 돌파구는 독일 유학이었다. 판에 박힌 국내 미술대학 입시에서 벗어나 자유롭고 창의적인 예술가를 양성하는 독일의 미술대학(쿤스트아카데미)에 도전해 보겠다는 아이의 결심을 나는 전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아이는 어려서부터 독일이라는 나라를 좋아해서 예고입시가 끝났을 때 난데없이 독일어를 공부하고 싶다고 했었다. 당시에 나는 내신준비에도 바쁜 시기에 무슨 독일어냐며 난감해했지만 아이의 고집을 꺾기 어려워 인터넷강의를 듣게 해 준 적이 있다. 독일은 아이에게 훌륭한 대안이 되어 주었다. 난 독일유학의 성패나 실현 가능성을 떠나 무조건 아이를 지지해 주었으며 독일 미대 입시에 대해 본격적으로 탐구하기 시작했다. 경쟁환경에서 스트레스를 받아 번아웃이 왔고 과거의 상처가 함께 터져 걷잡을 수 없는 아이를 또 치열한 입시환경에 내몰고 싶지 않았다.


그런 측면에서 독일은 아이의 피해의식이나 열등감을 자극하지 않으면서 미래에 대한 희망을 심어줄 수 있는 아주 매력적인 목표가 아닐 수 없었다. 아이에게 희망을 줄 수 있는 거라면 나는 지푸라기라도 잡을 셈이었다. 문제는 독일유학이 아이에게 또 다른 좌절의 계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거였다. 아이가 할 수 있는 건 하겠지만 걸림돌이 될만한 걸 최대한 제거해 주는 건 나의 몫이었다.


아이와 나는 거제에서 두 가지를 건졌다고 생각한다. 하나는 새로운 목표였고 또 하나는 집에 대한 향수였다. 우리는 당초 4주간 숙소를 빌렸지만 3주가 조금 넘어 올라왔다. 그 이유는 두 가지다. 하나는 주마다 한 번씩 상담을 받으러 서울에 올라오는 게 너무 번거로웠다. 물론 운전은 내가 했지만 6시간 가까이 걸리는 거리는 아이에게도 버거웠다. 첫 주에는 아침 일찍 출발하여 오후에 상담을 받고 집에 들러 하룻밤 자고 가기로 했다.


그런데 아이는 오랜만에 집에 들렀을 때에는 기분이 좋았지만 저녁이 되자 마음이 바뀌어 거제로 내려가자고 때를 썼다. 난 별수 없이 한밤중에 다시 거제로 내려왔고 도착했을 때는 꼭두새벽이었다. 아이는 그때까지도 집이 불편했던 것이다. 그런데 세 번째 서울에 올라가려 했을 때 다시 내려오지 말자고 했다. 한달살이를 조금 일찍 접자는 뜻이었다. 아이는 다시 내려오기 피곤하다는 핑계를 댔지만 아마도 집이 그리웠던 게 아닌가 싶다. 그 뒤로도 가끔 집이 불편하다고 했지만 전에 비해 한결 나아진 것은 분명했다.


그렇게 우리의 한달살이는 21일 살이로 끝이 났지만 돌이켜보면 최선의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 잠깐의 멈춤이 가져다준 게 무엇인지 그때는 몰랐지만 그 뒤 4개월이 넘어가는 이제야 조금씩 아주 조금씩 드러나는 것 같아서다. 아이는 아주 조금씩 스스로를 통제하기 시작했고 계획적인 생활을 아주 조금씩 만들어가는 중이다. 반갑고 기특하기 그지없으면서 마음 한구석에는 여전히 긴장과 걱정이 도사리고 있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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