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lking on the ground

휴직일기, +39일(2021. 6. 9)

by 낙산우공

여느 오월 답지 않게 비가 잦더니 아침저녁으로 쌀쌀하기까지 하였다. 폭염을 대비한 에어컨이 무색하게 가을로 넘어가나 싶더니 유월의 시작과 함께 어김없이 여름이 찾아왔다. 아침볕도 뜨거워 산책하기 쉽지 않아 이른 새벽에 반려견 호두와 길을 나섰다.


시계를 보지 않으면 믿기 어려울 만큼 훤하게 동이 트였고 선선한 바람까지 산책하기엔 그만이다. 서머타임이 왜 나왔는지 궁금하지 않을 만큼 여름의 해는 길다. 시차에 적응 못한 여행객처럼 하품이 나오는 걸 빼면 길을 걷는 내 모습이 하나도 어색하지 않았다.


새벽의 동네 풍경을 경험해 볼 기회가 없기도 했지만 애써 주위를 둘러볼 마음의 여유가 없었던 게 맞을 거다. 그런데 새벽을 맞는 사람들은 의외로 많았고 또 다양하였다. 제일 먼저 아파트 단지 곳곳을 빗질하시는 관리사무소 직원분들을 마주하게 되었다. 그분들은 분주하기도 하였고 또 새벽부터 강아지를 데리고 나온 간소한 차림의 중년 남자가 낯설기도 하신 것 같았다.


일하시는 중간에 흘끔흘끔 쳐다보는 시선을 느꼈지만 선뜻 인사를 나누진 못했다. 허릴 굽힌 채 빗질하시는 그분들께는 나의 공손한 인사마저도 방해가 될 듯싶었고 한가로이 산책을 나온 젊은 내 모습에 불편해 할 수도 있겠다는 나의 과한 배려도 한몫하였다. 그저 서둘러 그 자리를 피해드리는 게 낫겠다는 생각이었다. 이 분들과는 오후에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러 나오면서 또 한 번 부딪힌다. 이제는 내 존재를 궁금해하실 법도 하다. 젊은 나이에 백수라니 혀를 끌끌 찰 수도 있을 것이다.


단지 밖을 나오면 총총히 출근길을 재촉하는 이들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그들을 보면 불과 얼마 전 내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 같았다. 다른 점은 그 시간이 6시를 조금 넘긴 새벽이라는 것뿐 얼굴 표정과 차림새 그리고 걸음걸이 등 공통점이 많아 보였다. 대체로 무거워 보인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하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밝게 웃는 이가 없는 것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다르지 않다. 몇 해 전 가족여행으로 다녀온 런던의 아침 지하철 풍경도 꼭 같았다. 아침부터 시내 관광을 위해 서둘러 나온 우리와는 확연히 다른 그들을 마주하면서 표정관리를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으나 10대 초중반의 남매에게 그걸 기대하기란 대략 난감이다. 아무튼 무거운 공기가 장악하고 있는 어두운 지하철에서 우리만 신이 나 있었다. 그 몇 년 전 홍콩에서도…


출근길을 재촉하는 이들을 피해 집 근처 공원으로 발길을 돌렸다. 대한민국의 평일 아침에는 젊은 백수가 발 디딜 곳이 없다. 물론 나이 오십을 젊다 할 수 없으나 이 나라 경제활동인구의 연령분포를 본다면 새파랗게 젊다고 해야 할 나이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바람직하든 그렇지 않든 간에 말이다.


공원의 새벽 풍경은 또 다르다. 그곳에는 다양한 연령층이 존재하며 의외로 젊은이들도 많다. 물론 부지런한 노인분들이 상쾌한 아침운동을 위해 가장 많이 찾으시지만 미래를 준비하는 청년, 나처럼 반려견을 동반한 여성분, 심지어는 벤치를 차지하고 있는 취객 혹은 노숙인 같은 분들도 심심치 않게 등장한다. 강아지를 키워 본 분들은 알겠지만 이 녀석들은 발꼬랑내와 같이 오래된 냄새를 좋아한다. 겁이 유난히 많은 우리 집 호두마저도 노숙인 곁을 쉽게 떠나지 못하는 것을 보면 말이다. 행여나 불쾌해하실까 봐 목줄을 잡아 끄는데 진땀이 났다.


휴직을 하고 아이들의 입시 뒷바라지와 가사로 내 일상은 그리 한가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업을 중단하였으니 바쁜 와중에도 불쑥불쑥 찾아오는 여유로움과 그때마다 느껴지는 희열은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행복감을 느끼는 순간은 반복되는 일상의 루틴을 과감하게 벗어던질 때다. 아침은 몇 시에 일어나야 하고 몇 시까지는 출근 준비를 마쳐야 하고… 하는 식으로 심지어는 분단위로 움직여야 할 때 그 압박감은 나를 지치게 하였다. 직장의 일로도 항상 다이어리를 끼고 살아야 했는데 거기에 아이들의 일까지 겹쳐지면 가끔 멘탈이 털리는 기분을 경험하곤 했다.


오늘도 큰애의 갑작스러운 레슨 일정 때문에 새벽 5시도 안되어 일어났지만 덕분에 여유 넘치는 아침시간에 산책을 즐겼다. 보통 아이들과 아내가 등교를 하고 난 뒤 오전 시간에 명상과 요가를 했지만 요가매트를 깔아만 놓고 지금도 이 글을 끄적거리고 있다. 좀 늦게 시작해도 되고 오후에 해도 되고 그도 아니면 오늘 하루 접으면 그만인 거다. 그렇다고 나의 일상이 게을러진 건 아니다. 한동안 묵혀둔 집안일을 하나씩 찾아서 하고 있고 미뤄둔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있다.


게으름을 떨기 위해 감행한 휴직이 아니기에 스스로에게 엄격하려 하지만 반강제적으로 강요된 일상의 루틴은 가급적 배제하려고 한다. 난 숨을 쉬기 위해서 휴직을 했고 형식에 얽매여 놓치고 살았던 것을 되찾기 위한 10개월을 살고 있으니 말이다.




오늘의 감상,

요가와 명상은 마음의 근육을 만들기 위해 시작하였다. 그러나 모든 일은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기에 몸의 근육도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에 근력운동도 시작하려 한다. 근사한 잔근육의 미중년을 포기한지는 오래고, 항상 저질 체력에 순간순간 방전되는 허약함에서 탈출해 보려는 것이다. 그래도 오늘은 만사가 귀찮아 접으려는 순간 딸아이에게서 문자가 왔다. “아빠, 준비물을 깜빡했어. 미안한데 점심시간에 갖다 줄 수 있어?” 루틴이 없어도 우리는 늘 바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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