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대 두 번가는 꿈보다 생생한…
대한민국에서 병역의무를 마친 남자들이 가장 끔찍해하는 꿈은 군대 두 번가는 꿈이다. 나이 쉰이 넘어도 아주 가끔은 꾼다. 아들이 군대 갈 나이가 되어가면서 부쩍 더 꾸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어릴 적 “진짜사나이”라는 예능 프로그램을 보고 나서 군대에 대한 포비아가 생긴 아들이 종종 나에게 자기 대신 군대에 가 줄 수 없냐는 뻔뻔한(?) 요구를 해왔다. 그 영향 탓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요즘 회자되는 ‘시니어 아미’를 하기에도 부적절한 나이가 되어버려서인지 예전같이 자주 꾸진 않는다.
언젠가부터 내 불길한 꿈의 단골 소재가 바뀌었다는 사실을 불과 며칠 전에야 확실히 알았다. 나는 13년간 다섯 곳의 직장을 옮겨 다닌 뒤에야 비로소 지금의 직장에 자리를 잡았고 그렇게 다시 10년의 세월이 흘렀다. 흔하지 않은 이력인 탓인지 언제부터인가 내 불길한 꿈의 단골소재는 첫 직장에 다시 가는 꿈이 되어 있었다. 나는 간절한 마음으로 무려 다섯 차례나 3년 차 때마다 이직을 했지만 내가 거쳐간 직장들은 지금도 모두 건재하다. 그런 탓일까? 다니는 직장이 힘들어질 때마다 나는 첫 직장에 돌아가 있는 꿈을 꾸는 것 같다.
나는 2000년에 직장생활을 시작했고 2003년에 그 직장을 나왔는데 20년이 훌쩍 넘어버린 요즘에도 그곳에 다시 가는 꿈을 꾸는 것이다. 꿈을 꿀 때마다 나는 의아함보다는 당황스러움을 금할 수 없다. 무려 20년이 더 지나서 다시 돌아갔건만 나는 20여 년 전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다. 그러니 그 일이 내게 편할 리 없다. 나는 난해한 기술명세서를, 그것도 영어로 작성된 글을 읽고 번역하며 끙끙댄다. 심지어 직장 동료들도 낯설거나 혹은 낯이 익지만 불편한 사람들뿐이다. 나와 친했던 동료들은 이미 삼삼오오 그곳을 떠났다는 걸 알고 있다.
그런데 나만 어찌해서 이곳에 다시 왔는지 알지 못하므로 당혹감을 감출 수 없다. 지난 20여 년간 각고의 노력으로 지금의 자리까지 왔는데 나는 어찌하여 첫 직장에 돌아와 있는지 도무지 영문을 모를 일이다. 그렇게 한참 동안 진땀을 흘리다가 비로소 이 모든 게 꿈인 걸 알게 된다. 그렇게 꿈속에서조차 나는 안도하며 기쁜 마음으로 꿈에서 깨어난다. 이 반복되는 레퍼토리가 사실은 불안한 내 심리상태를 반영하는 꿈이라는 걸 이젠 확실히 알게 되었다.
오십을 지천명의 나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불안하기 짝이 없다. 오십 대엔 욕심과 야망을 내려놓기 때문에 치열한 사십 대보다 한결 여유롭다는 이야기는 도대체 누구의 입에서 나왔는가? 마음을 내려놓는 것은 분명하지만 오십 대에 닥치는 운명은 대체로 가혹하기 짝이 없다. 사회적으로는 도태되기 직전이며 가정에서도 갖가지 위기의 징후들이 속출한다.
오십 대가 불안한 이유는 내 의지로 통제할 수 없는 일에 무시로 휘말리기 때문이다. 나는 아이들의 입시로 그리고 둘째의 우울증 투병으로 3년 동안 두 차례나 휴직을 했다. 이 나이에 휴직이 가능한 직장에 다니는 걸 감사해야 하는 건 맞지만 마음이 편할리 없다. 게다가 그곳에 돌아가야 할 시간이 코앞에 다가왔건만 내 아이는 이제 겨우 웃음을 되찾았을 뿐이다. 갈 길은 구만린데 나는 무려 오십대다. 시들다 못해 말라비틀어진 청춘의 열정을 찾아내려고 마른 수건을 비틀고 있는 내게 오십 대의 원숙함과 여유로움을 바란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그렇게 나는 오십 세 번째 해를 맞았다. 고갈된 연료를 바닥까지 훑으면서 엔진을 돌리는 중이다. 그러니 첫 직장에 돌아가는 흉흉한 꿈이나 꾸면서 그렇게 24년 차 직장인의 시시한 삶을 살아낸다. 내 의지와 상관없이 태어났는데 내 뜻대로 살아질 거라 기대할 수 없다. 오십의 지천명은 운명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거다. 나는 그렇게 막 오십 고개를 넘고 있다. 내게 육십 대가 어떠리라는 희망 따윈 없다. 어떻게든 지금의 운명을 슬기롭게 헤쳐나가는 일에만 집중할 뿐이다.
나의 첫 직장 꿈이 내게 주는 암시는 그런 것이었다. 나는 20여 년 전에 그 끔찍한 곳을 탈출했고 현실의 나는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았다는 사실… 그것을 일깨워준다. 그래서 꿈꾸는 내내 불편하지만 깨어난 현실이 반갑다. 나의 오늘은 반가운 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