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들 퇴직할 나이에....
꼬박 1년의 자녀돌봄휴직을 마치고 복직을 했다. 남들 퇴직할 나이에 휴직을 하고도 모자라 1년 만에 다시 별 탈없이 제 자리에 돌아왔으니 입이 열개라도 감사할 따름이다. 그 감사한 자리에 오기까지 복잡한 심경으로 오만가지 상상의 시나리오를 짜 맞추긴 했지만 말이다. 눈치 안 보고 다시 생업에 종사할 수 있다는 것은 축복이 분명하다. 이 축복의 시간이 없었다면 아이도 그리고 나도 지금과 같지는 않았으리라.
복직이 두 달도 남지 않았을 무렵 매물로 내놓은 집을 서둘러 들여놓고 대대적인 집수리(리모델링) 공사에 들어갔던 것은 신의 한 수였는지 모른다. 과도한 지출에 엄두가 나지 않았던 일을 나는 저질러 버렸고 다수의 업체를 수소문하여 공기를 맞출 수 있는 딱 한 곳을 찾아내고야 말았다. 여러 가지 우려가 있었고 실제로도 크고 작은 일들이 생겼지만 결과적으로는 대성공이라고 평가할 만하다. 아이는 여전히 이른 하교를 하고 있지만 안정감을 주는 집의 감성에 빠져있다. 혼자 집에 남아 있을 아이, 내 걱정은 온전히 그것뿐이었다.
경제적인 문제를 생각했다면 3년 동안 두 차례나 휴직을 하지는 못했다. 그것도 직장에서 모가지가 간당간당해진다는 50대에 말이다. 청년실업이 사회적 문제로 대두된 지도 10년은 족히 넘었다. 그 분위기에서 철밥통이니 정년보장이니 하는 이야기는 금기시된 지 오래다. 나는 그러한 금기를 이야기하려는 게 아니다. 그저 조직에서 뿌리를 내리고도 남았을 나이에 도발적인 선택을 했던 나의 후기를 잠시 남기려는 것뿐이다.
한 직장을 10년 넘게 다니다 보면 내가 모르는 사람은 있어도 나를 모르는 사람은 잘 없다. 부서가 다르고 얼굴도 낯설지만 3년 동안 두 번이나 휴직을 한 나의 소식은 암암리에 모두의 귀에 들어간 것이 분명했다. 그 사이에 다양한 형태의 휴직을 하고 또 복직을 했던 이들이 있지만 그중 남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육아휴직이 아닌 자녀돌봄 무급휴직자는 성별을 불문하고도 나 외에는 없었다. 나는 그런 도발을 감행한 것이다. 아니 남들의 눈에 도발이었을 뿐 사실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우리는 상황논리에 매몰되어 불가피한 선택을 기피할 뿐, 누구에게나 선택의 기회는 주어진다. 스스로 그 고민조차 거부할 뿐이다. 나는 과감하게 고민했고 불가피하게 선택했을 뿐이다. 그러나 나의 처지나 고심의 흔적 따위와 무관하게 조직은, 아니 조직의 사람들은 곱지 않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노골적이지 않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일주일 넘게 회사 내에서 바닥만 쳐다보고 걷는다. 누군가와 시선을 교환하는 것이 불편하다. 아이의 근황을 물어보는 이에게는 크게 웃으며 그저 많이 좋아졌다고 이야기할 뿐이다. 그들도 깊고 자세한 이야기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나의 반응에 바로 잘됐다며 짧은 수습의 덕담을 던지는 걸 보면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런 관계에 익숙하다. 서로 깊어지지 않고 그래서 피곤해질 일이 없는 관계... 그래야 만남도 헤어짐도 편하다. 서서히 기억에서 떠나보내는 것이다. 내가 휴직하는 동안 본인의 의지와 무관하게 직장을 떠난 이도 있다. 그의 불편한 상황이 염려되어 연락을 못하고 있었지만 4년 넘게 한 방에서 근무한 각별한 동료다. 그런 동료와도 편하게 근황을 묻지 않게 되는 게 조직이다. 나의 관심과 배려가 그에게는 좋지 않은 기억을 소환하는 기제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런 관계에 익숙해져 버렸고 또 그런 관계를 선호하게 되었다. 20여 년 직장 생활 동안 나에게 남은 관계는 손가락으로 꼽는다.
그렇게 손가락으로 꼽는 이들과 앞으로 한 달 정도는 띄엄띄엄 일정을 잡아 만남을 가질 것이다. 저녁 술자리를 함께 할 이유가 있는 관계, 나는 그 관계가 절대 다섯을 넘지 않는다. 아니 셋을 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 마저도 나는 성공이라 믿는다. 그렇게 만나다가 연락을 끊은 관계도 꽤 되기 때문이다. 조직은 관계로 얽혀 있지만 그 이유는 조직이 인간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 관계에 농밀함이 있다면 탈이 나기 마련이다. 이해관계에 얽힌 조직 내에서 순수하고 인간적인 관계를 기대하는 건 무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