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병은 사라지리니
한해 걸러 두 번의 휴직을 하고 돌아온 나의 조직은 여전하였다. 잠시 아이들과 가족의 일에 파묻혀 조직의 행적을 외면해 왔는데, 아니 애써 외면하려 했는데 조직의 강렬한 존재감을 무시할 수 있는 조직원은 없었다. 휴직 중간에도 간간히 회사소식을 전해주는 소식통이 이직을 한 후 나는 오히려 자유로움을 느꼈다. 그래서 굳이 그 질퍽질퍽한 속내를 알려하지 않았다.
그런데 언제나 조직은 복직 100일도 되기 전에 나에게 확실한 아이덴티티를 과시하곤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다행히도 나에게 직접적인 대미지를 가하진 못했지만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또 조직의 강력한 조직력에 추풍낙엽처럼 흔들렸다. 조직의 특수성으로 인해 계선(line) 조직의 형태와 참모(staff) 조직의 특징을 모두 갖고 있는 나의 회사는 언제나 계선을 장악한 특수한 직렬의 파워게임이 주도해 왔다.
전문성이라는 고유의 경쟁력을 높이 평가해 온 나는 그런 중간관리(보직) 자들의 횡포에서 나름대로 독립적인 지위(?)를 유지한다고 자부하며 버텨오고 있다. 이게 가능한 이유는 독립적인 업무성격과 내 분야에 대한 전문성 그리고 그들의 인사지휘권에 휘둘리지 않는 신분보장(정규직)에 있었다. 다만 그들의 정치행위에 일절 관심을 갖지 않는다는 나름의 철학도 한몫을 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내 동료들은 그러한 분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했고 그들은 몇 안 되는 계선의 관리보직을 잠시 차지하고는 다시 신분 연장(재계약)을 위해 조직의 질펀한 정치판에 자의 반 타의 반 참여하고 있었다. 그리고 요 며칠 그 지저분한 파워게임이 수면 아래에서 요동을 치다가 드디어 오늘 수면 위로 올라오고야 말았으니, 역시나 헤게모니를 쥐고 있는 직렬의 한판승으로 싱겁게 끝났버렸다.
자신의 신분을 망각하고 소신발언을 했던 나의 보스는 박살이 난 선풍기 하나를 남긴 채 쓸쓸히 패배를 인정하고 힘없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하필이면 그날이 나의 생일이라 우리는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한 채 예약한 식당에 앉아 애꿎은 갈비를 무심하게도 뜯었다. 일찍이 '무보직 평생(정년) 고용'이라는 사회적 삶에 대한 가치관을 확립한 나는 이들의 지저분한 싸움에서 자유로웠지만 마음 한편에 남겨진 묵직한 기분은 지울 수 없다.
무엇이 이들에게 이토록 치열하고 졸렬하며 지질한 싸움에 세상 진지할 수 있는지 나는 알지 못하지만 오늘 저녁의 즐거운 생일상 앞에서만큼은 까맣게 잊어버릴 수 있도록 퇴근하기 전에 이 글을 쓴다. 명예로운(?) 퇴직이 얼마 남지 않은 노병은 곧 사라지리니 조직이여 영원히 그 생산성 없는 싸움을 멈추지 않기를. 땅따먹기 전쟁놀이에 이골이 났던 아이들은 이제 회사에서 이렇게 노는 것뿐이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더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