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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직과 타협하기

개인이 극복할 수 있는 조직이란 없다.

by 낙산우공

직장생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나는 언제나 비관적 낙천주의자(?)의 입장을 견지했다. 언뜻 들으면 상반되는 단어의 조합 같지만 비관적인 것과 낙천적인 것은 별개의 의미로 볼 수 있다. 비관은 낙관의 반대말로 특정한 상황이나 현상에 대해 어둡게 혹은 절망적으로 전망하는 것이다. 그에 반해 낙천적이라는 건 세상과 인생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것으로 서로의 영역이 중첩되지 않는다.


나는 조직과 구성원의 관계를 대체로 비관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조직 안에서의 삶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내가 조직과의 관계를 회복할 수 있다고 기대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하여 조직에서의 내 삶을 끔찍하다고 여기 지도 않는다. 나는 조직에 굴종하지 않으면서도 그럭저럭 내 자존감을 유지하고 있고 그런 나의 태도가 조직 내에서 다소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더라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불가근불가원의 적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긴장의 끈을 놓지 않는 것, 그것이 내가 조직 내에서 살아가는 방식이었다. 조직과 자신을 동일시하면서 조직 내에서 승승장구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만큼의 끈적한 관계가 가능한 것은 그들이 조직의 주류를 장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주인의식은 가끔 도를 넘는 경우가 있지만 그런 행위가 내 영역을 침범하지 않는 한 나는 침묵했다.


그렇게 한 직장에 자리를 잡은 지 10년이 훌쩍 넘어버린 시기에 나는 슬며시 조직과 타협을 시도하고 있다. 이게 무슨 조화일까? 다섯 곳의 직장을 경험하면서 나는 언제나 절이 싫으면 중이 떠난다는 생각이었다. 절은 바뀌지 않는다. 결국 떠나야 할 사람은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는 중이다. 그렇다면 나의 여섯 번째 절이 바뀐 것일까? 그렇지는 않다. 다만 다섯 번의 이직을 통해 나에게 이보다 더 나은 절이 없다는 건 분명해졌다. 그래서 나는 절이 진절머리 나게 싫어질 때까지 버티어 보자고 생각했다.


간사한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 지금의 절은 가끔씩 나를 진절머리 나게 하였지만 대체로 나를 절망의 구렁텅이로 몰아넣지는 않았다. 물론 앞으로도 그럴 거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내가 조직 내에서 자존을 유진하는 방법은 그들의 시혜(?)를 구하지 않고 스스로 존재감을 유지하는 것이었다. 조직의 주류에 속하지 못한 많은 이들이 조직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는 이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온갖 행태를 보이는 걸 나는 항상 외면해 왔다.


그런데 나는 조직의 시혜를 구하지는 않을지언정 그들이 독차지하고 있는 주류의 자리 한 곳을 나누어달라고 손을 들어버린 것이다. 물론 내가 손을 들었다 하여 그들이 선뜻 나의 손을 잡을 리 없다. 그들의 시선이 끝끝내 나를 외면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처음으로 이 조직 내에서 나도 한 자리를 맡고 싶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그것이 그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 알 수 없으나 이 의사표명 외에 더 무엇을 구하진 않을 것이다.


그런데도 못내 나의 행동이 구차해 보이지 않을까 우려하는 나는 조직과 타협을 시도하는 것일까? 더한 몽니를 부리는 것일까? 정년이 다가오는데 아이들이 밟히는 건 모든 가장의 숙명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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