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걸 놀이로 생각했다. 어리석게도...
어릴 적 아이들의 소꿉놀이는 죄다 역할극이다. 아이들이 매일 보는 사람이 엄마, 아빠이니 그 범위를 벗어날 수 없을 테지만 그들이 만나는 세계의 전부라고 할 수 있는 엄마, 아빠의 흉내를 내는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등골이 오싹하고 소름이 돋을 때가 있었다. 그들의 예리한 관찰력이 어른을 부끄럽게 만드니 말이다. 아이들이 조금 크면 역할놀이는 유치원 선생님으로 확장되지만 그래도 엄마, 아빠놀이를 능가할 순 없다.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고 나만의 가정을 만들어가는 과정이 아이들의 눈에 어떻게 비칠지는 모르나 대부분의 아이들은 어른들의 세계를 동경한다. 그리고 자신도 그런 과정을 밟아나갈 것이라고 당연스럽게 생각하게 된다. 물론 그렇지 않은 아이들도 있지만 통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아이들은 그랬다. 그래서 어른이 되고 직장을 잡으면 짝을 만나 가정을 이루는 것을 당연한 수순으로 여겼고, 나 역시 그 패턴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처음 결혼을 하고 조그마한 집을 얻어 부부만의 살림을 장만하는 과정은 아이들의 소꿉놀이와 하나도 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덜컥 아이가 생기면서 나의 역할놀이는 막중한 책임감이라는 또 다른 부담과 마주하게 되었고 그것은 20년이 넘도록 당최 사라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자라며, 이때 자란다는 건 단순히 신체적 발육에 그치지 않는다.
그 예측불허의 상황에 매번 지혜롭고 현명한 부모로 대처하는 건 당연히 불가능에 가깝다. 아니 절대로 불가능하다. 아이가 무난하게 자라준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면 당신은 이제부터 불안해해야 한다. "지랄총량의 법칙(?)"과 같이 아이는 결코 당신을 평화롭게 방치하지 않을 테니 말이다. 나는 두 아이를 키우며 많은 면에서 서로 대조적인 아이를 경험했지만 나의 애간장을 태우고 힘들게 하는 면에서 그들은 결코 우열을 가리기 어려웠다.
모든 역할에는 그 역할 고유의 임무가 있다. 그 임무에 소홀하면 그는 그 역할에 합당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한 평가에 무심할 수 있는 사람은 잘 없다. 나는 타고나기를 게으른 인간이었지만 역할이 주어지면 막중한 책임감을 감당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성격이기도 했다. 그래서 역할을 맡지 않을 땐 세상에 부러울 게 없는 귀차니스트였지만 역할이 주어지면 세상 누구보다 부지런해져 버렸다.
나는 직장에서 책임 있는 자리에 앉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이다(물론 내 노력과 무관할 수도...). 어떤 자리이건 그 자리에 합당한 책임이 따르기 때문이다. 그 자리가 제아무리 빛나 보여도 "왕관을 쓰려는 자, 무게를 견뎌라'와 같이 우린 그 자리에 합당한 책임을 온전히 감당해야 한다. 물론 그 자리에 앉은 모두가 그런 역할에 충실한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그래서 나는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굳이 나서서 그런 자리를 탐내지 않았다.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지만 직장생활 10년 차를 넘어서면서 깨달은 통찰이었다.
그때부터 나는 사회적 성취에 집착하지 않고 소소하게 나만의 행복한 가정을 꾸리고 소시민으로 살겠다는 꿈을 꾸었다. 그리고 이 꿈이 얼마나 거창한 것인지를 2~3년 전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대부분의 사회적 지위와 명예에 집착하는 사람들은 소소한 가정의 행복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그 결핍으로 인해 그렇게 산다는 것을 말이다. 아빠라는 자리는 세상의 그 어느 자리보다 고귀한 자리였고 그에 합당하게 막중한 책임이 부여되어 있었다.
살면서 아빠라는 역할에 부여된 책임을 온전하게 감당하는 사람을 많이 발견하지 못했지만 드문드문 눈에 띄는 그들은 모두 놀라운 품격과 성찰의 경지를 보여주곤 했다. 내가 언젠가 내 아이들에게서 그와 같은 평가를 받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의 삶은 비로소 완성될 것이다. 우리는 치명적으로 어리석게 가정이라는 울타리를 만들지만 어릴 적 생각에 소꿉놀이쯤으로 행동하다가 아주 큰 낭패를 보게 되는 것이다.
엄마는 하루 종일 온 가족에게 잔소리하는 사람, 아빠는 술 먹고 늦게 들어와 엄마에게 혼나는 사람으로 보였을지 모르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놀이의 세계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엄마 몰래 비상금을 숨겼다가 들통이 나고 그 비밀을 감추기 위해 아이에게 장난감을 사주는 아빠의 모습처럼 그렇게 허술하고 어설프게 해 낼 수 있는 역할이 아니다. 아빠라는 자리는 말이다.
혹독한 시련을 온전히 홀로 이겨내야만 진정 아빠라는 호칭에, 그 역할에 온당한 인간이 탄생한다는 사실을 나는 뒤늦게 깨달았지만, 이제야 그 자리를 조금이나마 흉내 내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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