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세계에도 존재하는 명은원 선생
남의 밥상에 숟가락을 올리는 건 거지들이 하는 짓이다. 그래서 그들은 빈 밥통과 숟가락만 가지고 다닌다. 구도의 삶을 위해 일체의 생계활동을 거부한 수도승의 탁발과는 차원이 다르다. 거지는 빌어먹겠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천명하고 그로부터 비롯되는 모든 괄시와 천대를 견딜 각오를 한 자이다. 그런데 거지가 아닌 척하면서 남의 밥상에 숟가락을 얹는다면 그는 거지인가? 거지보다 못한 존재인가?
부끄러움을 모르는 자를 파렴치한이라고 한다. 거지는 자신의 빈곤을 부끄러워하지 않지만 거지행세를 하기 때문에 많은 이들이 그들에게 적선을 한다. 따라서 그들은 파렴치한 것이 아니다. 반면에 빈곤하지 않으면서 남의 밥상에 기웃거리는 자는 파렴치한 것이 맞다. 우린 직장에서 사회에서 이런 인간들을 어렵지 않게 만나게 된다. 그들에게 '거지 같다'는 표현을 쓰면 백이면 백 발끈할 것이다. 그런데 사실 그들은 거지만도 못한 존재가 분명하다.
유난히 바쁘고 정신없었던 5월의 한주를 보내고 나서 나는 동일한 인물로 인하여 이러한 경험(?)을 한 두 사람의 면담자가 되고 말았다. 그들이 왜 나를 하소연의 대상으로 삼았는지는 짐작이 갔다. 어딘가에는 이 억울하고 분한 이야기를 해야만 했고 그 이야기를 공감하고 들어줄 사람이 드문 게 직장이란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두 명의 동료가 그 대상으로 나를 선택한 것이다. 내 코가 석자인 형편에 나는 졸지에 카운슬러가 되었다.
첫 번째 동료는 몇 달 동안 공들인 자신의 결과물이 거지보다 못한 누군가와의 공동 작품으로 둔갑하는 경험을 했다. 그의 밥상에 날름 숟가락을 얹은 이는 당연히 그의 상급자였다. 그리고 어찌 보면 상을 차린 건 그였지만 그 밥상의 모든 구성과 레시피를 지시한 건 그의 상급자인양 비칠 수 있는 행동을 하였다. 듣고만 있어도 피가 거꾸로 솟을 일이다. 그 기분을 내가 바로 느낀 건 당연히 유사한 경험이 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동료는 이직을 한지 몇 달 되지 않은 경력직이었다. 누구보다 일 욕심이 많고 열정이 있었던 그를 그의 상급자는 힘들어했다. 그리고 둘 사이엔 묘한 기싸움이 반복되었다. 그 피곤한 관계에 지친 동료가 나에게 하소연을 한 것이다. 상급자는 그가 자신의 권위에 도전한다는 위기감을 느꼈고 그 기를 꺾어놓기 위해 종잡을 수 없는 지시와 업무개입을 한 것이다. 이 일이 앞의 사건과 동일하게 느껴진 건 아마도 상급자의 다음 행보가 예측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기를 꺾어놓아야 두 번째 동료의 밥상에도 숟가락을 올릴 수 있지 않겠는가 말이다. 두 사람과 며칠 상관으로 면담을 하면서 내가 그들에게 해준 이야기는 별게 없다. 다만 공통적인 것은 이 문제로 인해 당신들이 느끼는 분노와 억울함을 직접적으로 분출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세상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은 건 남의 다된 밥상에 무시로 숟가락을 올리는 행위를 알만한 이들은 다 알게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밥을 차린 자와 숟가락을 얹은 자를 구분한다. 따라서 첫 번째 동료가 분기탱천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이 문제를 정면으로 반박하지 말고 넌지시 되받아주어도 된다. 두 번째 동료도 상급자의 이해할 수 없는 행보에 발끈해서 이직을 고민하는 것보다는 고분고분하게 받아주는 척 존중해 주면 된다. 정말로 첨예하게 대립해야 할 때를 대비해서 미리 관계를 악화시킬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싸울 때와 물러설 때를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직장을 전쟁터라 하는지도 모른다.
내 조언이 그들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었을지 알 수 없지만, 그와 같은 분기탱천을 오랫동안 경험한 입장에서 내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그들의 능력과 열정은 결코 가려지지 않기 때문에 상급자의 거지만도 못한 행위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는 없다. 다만, 수시로 올라오는 분노를 다스릴 자기만의 비법 하나쯤은 갖추어야 할 것이다. 이것이 내가 '슬기로울 전공의생활'이라는 드라마에서 명은원 선생에게 이용당하는 구도원 선생이 한심해 보이지 않는 이유다. 세상은 의외로 예리하다. 남의 밥상에 숟가락 얹는 놈에게 함부로 속아 넘어가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