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젖은 낙엽

그들은 스스로를 그렇게 불렀다.

by 낙산우공

여의도 바닥에서 직장생활을 한지도 12년이 되어간다. 마흔 초입에 입도(?)해서 어느덧 쉰을 넘어 정년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어버린 이제서야 한동네 섬주민(?) 친구들과 모임을 가졌다. 20년 넘게 섬생활 중인 금융가의 고교동창 둘과 우연한 기회에 연락이 되어 만났는데 그동안에도 간혹 만남을 가졌으나 여의도에서 모인 건 처음이었다. 신기하게도.


여의도는 섬 가운데를 가로지르는 공원을 중심으로 서쪽과 동쪽이 확연히 나뉜다.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두동강이 난 분단 조국이 연상되기도 한다. 서쪽은 국회와 KBS를 중심으로 몇몇 공공기관과 기업들이 모여있고 동쪽은 거래소를 중심으로 증권사들이 밀집되어 있어 유동인구의 유형이 다르고 그래서 상권과 분위기가 딴판이다. 게다가 공원과 큰 도로가 장벽처럼 작용하여 서로 넘어다니기도 쉽지 않다. 나는 12년 동안 동쪽으로 넘어간 횟수가 다섯 번이 안 되는 것 같고 3년 전에야 양쪽을 연결하는 지하통로(도보로)가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금융가의 친구들은 대화 주제가 다르다. 언제나 돈(투자상품)과 연결되어 있고 전문용어들이 난무하니 대화에 끼기도 어려울뿐더러 재미도 없다. 관심사항이 다르니 어쩔 수 없다. 직업은 이렇게 같은 사람을 딴 사람처럼 만들기도 한다. 증권사를 나와 유관업체에 다니는 친구도 거래소 자회사에 다니는 친구도 근황을 묻는 나에게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 나이에 뭐 어떻게 산다고 말할 게 있냐? 그냥 젖은 낙엽처럼 사는 거지..."


젖은 낙엽... 참으로 생경하지만 뭔지 알 것 같은 단어였다. 낙엽인 것도 슬픈데 젖기까지 했으니 살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뜻이려니 했다. 오늘 아침에 갑자기 그 단어가 떠올라 검색을 했더니 오픈사전에 이렇게 설명이 되어 있었다.


"구두나 몸에 붙으면 쉽게 떼어지지 않는 젖은 낙엽처럼 퇴직 후 하루 종일 집에 있으면서 집안일을 도와주지 않는 남편을 빗댄 말로 제대로 떨어지지도 않으면서도 쓸모는 없는 존재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출처: 네이버오픈사전)


이 녀석들은 아직 퇴직 전이니 집이 아닌 직장에 달라붙어 쉽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발버둥 치고 있다는 뜻이었다. 한번 붙으면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고 그런데 쓸모는 없는 존재... 세상에나, 자신을 이렇게까지 비하하면서 부르는 그들의 자조적인 표현이 나는 슬프기보다 처량했다. 그들은 젖은 낙엽이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었다. 인간의 존엄이 이렇게 한 순간에 훼손되는구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 그런데 이 녀석들은 지렁이가 아니다. 따라서 꿈틀정도가 아니라 발끈 혹은 그 이상 분기탱천할 것이다. 그런데 젖은 낙엽이라고 애써 스스로를 비하하는 이유는 뻔했다. 자기 최면이었다.. 어지간한 무시나 모욕은 참겠다는.


증권사 유관업체에 다니는 친구가 나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주며 의견을 물어왔다. 최근에 업무로 엮인 대기업 증권사(속칭, 갑)의 담당자가 고등학교 동창인 것을 알고는 사장이 자기를 앞세워 대면시키려 하는데 하필 그 녀석이 학교 다닐 때 자신과 치고받고 싸운 상대라는 것이다. 그런데 그 녀석과 과거의 악연을 풀고 관계를 회복할 수 있겠냐고 나에게 묻는 것이었다.


나의 친구는 나에게 질문을 한 것이 아니었다. 사실은 그 녀석과 관계를 복원해야 하는 처지였던 거다. 그런데 나는 내 친구와 과거에 치고받았다는 그 녀석을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 녀석은 학교 다닐 때 여럿의 아이들과 종종 시비가 붙어 싸우던 녀석이었고 성격이 모나고 못돼처먹기로 유명한 놈이었다. 그 녀석이 대학에 가서도 동기모임에서 하도 진상질을 부려서 동기들한테 얻어맞은 적이 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 들었던 놈이었다.


나는 애써 친구를 말렸다. 업무상 정말로 불가피한 게 아니라면 피하라고 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는데 그 녀석 성격이 달라졌을 리 없고, 심지어 내 친구와 시비가 붙었을 때 친구에게 흠씬 두들겨 맞은 녀석이었다. 그 녀석은 아무에게나 종종 싸움을 걸고는 두들겨 팼는데 그렇게 까불다가 한번 내 친구에게 호되게 맞았던 것이다. 그런 녀석이 그 기억을 잊었을 리 없었다.


나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던 친구는 그 녀석이 여전히 그 성격을 못 버린 것 같고 현재 다니는 증권사에서도 악명이 높다고 했다. 그런데 그날 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드는 생각은 내 친구가 아무래도 그 녀석을 구워삶기 위해 모종의 만남을 주선할 것 같다는 예감이었다. 그 자리에서 내 친구가 모욕을 당하지 않기를 바라지만 과거 친구 녀석이 증권사에서 갑질을 할 때는 협력업체 나이 든 부장의 뺨을 때린 적도 있다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되로 주고 말로 받는 거다. 인생은.... 심지어 젖은 낙엽 시절이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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