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부자가 말을 아낄 때 뻔뻔해 보일 수 있다.
자고로 웅변은 은이요, 침묵은 금이라 했다. 특히 남자에게 과묵함은 중요한 덕목이 된 지 오래다.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나 모든 일반화에는 단순함과 과격함이 내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즉, 말을 아끼고 입이 무거운 것이 스스로의 잘못을 감추고 실수를 덮기 위한 수단으로 오용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말이 많으면 사달이 난다. 그러나 필요한 말을 아끼면 상황이 악화되는 걸 방치하는 무책임을 초래하기도 한다.
그동안 우리는 침묵은 금이라 하며 과묵한 남성을 이상적인 남성성으로 포장해 온 것은 아닐까? 요즘의 사람들이 말을 아끼는 것을 보고 있으면 안타까움을 넘어 저열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예컨대 누군가에게는 흉이 되는 사실을 내가 알고 있다고 하여 굳이 남들에게 떠벌릴 이유는 없다. 설령 내가 알고 있는 사실이 명명백백하다고 하여도 내가 타인에게 그 사실을 옮기려는 이유가 그저 누군가의 부끄러운 사건을 폭로하려는 것이라면 말이다. 그건 그저 가십에 불과하다. 이럴 땐 침묵이 금이다.
그런데 불합리한 누군가의 행동이 그의 우월적 지위로 인해 타인에게 치명적인 피해를 입히고 있는 것을 알고도 침묵을 지킨다면 그는 입이 무거운 것이 아니라 비겁한 것이다. 즉, 만천하에 밝혀서 시시비비를 따지거나 누군가의 잘못을 바로잡으려 하는 행위는 정당할 뿐 아니라 용감한 것이다. 그런데 그를 가리켜 입이 가볍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는 이해관계에 따라 편의적으로 침묵을 강요해 오지는 않았는가? 혹은 스스로에게 그런 정당성으로 자신을 합리화해 온 것은 아닌가?
오늘 가까운 지인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우연히 알게 된 조직 내의 불합리하고 부당한 사건에 대하여 이야기를 꺼냈더니 제일 먼저 들어온 질문은 이랬다.
"누구한테 들었어? OOO이 얘기했구나. 거기서 들었지?"
그들이 최소한 사건의 진위를 따졌다면 오늘 이렇게 기분이 불편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은 그 사건의 존재에 대하여 첫 번째는 알고 싶어 하지 않았으며 두 번째는 평가하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뻔했다. 자신의 이익에 하등의 도움이 되지 않으며 괜히 입에 올렸다가 본의 아니게 사건에 연루되는 것이 두려웠을 것이다. 나는 그들이 그 부당함에 대하여 저항해 주기를 바란 것이 아니다. 그저 누구에게도 벌어질 수 있는 일에 대하여 공감해 주기를 바랐다.
그런데 그들 모두는 말을 아꼈다. 그들의 반응에는 어떤 동조나 평가가 자신에게 또 다른 불이익으로 돌아올지 모른다는 불안이 보였다. 그들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앞에서도 자신과의 이해관계를 따졌다. 그 사건이 자신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면 아마도 그들은 핏대를 세우고 드잡이를 하였을지도 모른다. 그들은 언제나처럼 나의 이야기에 긍정도 부정도 취하지 않았다. 'Neither Confirm Nor Deny'는 외교에서만 쓰이는 전략이 아니었다. 그런데 그것이 국가 간 외교관계가 아니라 사람 사이의 일일 때 우리는 '뜨뜻미지근하다'라고 한다.
그들과의 식사 후 나는 다시 절망했다. 가까운 지인이라니... 그런 터무니없는 관계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미련한 자라도 잠잠하면 지혜로운 자로 여겨지고 그의 입술을 닫으면 슬기로운 자로 여겨지느니라
- 잠언 17장 28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