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어디쯤에서 나도 헤매고 있겠지
대부분의 인간은 자신의 행동이나 신념을 정당화해 자존감을 보호하려는 자기 합리화 성향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심리학에서 말하듯 자기 합리화는 방어기제이기 때문에 합리화의 근거가 명쾌하지 않을 경우가 많다. 그것을 스스로 자각하는 것을 자기 객관화라고 한다. 정확히 말해 '자기'라는 단어와 '객관화'라는 단어는 충돌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자신을 온전히 객관화하는 것은 어렵다. 다만 그 노력을 게을리하면 과도한 자기 합리화를 넘어 자기 연민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게 된다.
물론 자기 합리화 자체를 거부하는 부류의 인간도 있다. 자신의 행동에 굳이 논리적 타당성을 부여하지 않아도 그들은 개의치 않는다. 그런 부류는 의외의 곳에서 뜻밖에 많이 발견되는데 이들에 대하여는 아무런 대책이 없다. 그저 최선을 다해 그들을 피하는 것 외에는 딱히 뾰족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다. 그래서 오늘의 주제에서 이들은 논외로 한다.
오늘은 자기 합리화와 자기 객관화 사이에서 갈등하는 나름 인간적인 부류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 며칠 전 한 모임의 일을 복기하고자 이 글을 쓰게 되었다. 그 모임은 20여 년 전 직장동료였던 여섯 명이 아주 오랜만에 모이는 자리였다. 한때 우리의 보스였던 한분이 작년에 정년퇴임을 하셨고 이미 뿔뿔이 흩어져 각자의 삶을 살아가던 나머지 다섯 명이 모여 조촐하게 퇴임기념 회식이라도 시켜드리자는 마음에 이들을 불러 모은 건 다름 아닌 나였다. 그리고 나는 모임 세 시간이 되기 전에 나의 철없는 행동을 후회했다.
20년 전 당시 30대 초반이었던 우리 다섯 명을 가리켜 회사에서는 '독수리 5형제'라는 묘한 호칭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여러 이유가 있겠으나 그들은 우리를 철저한 아웃사이더로 취급했고 그때 비주류의 길을 걷던 우리의 보스가 그날 모임의 주인공이었다. 그 보스는 회사(?)와 갈등하는 우리가 하나둘씩 회사를 떠난 뒤에도 홀로 정년까지 그 자리를 지켰지만, 우리의 이직을 위해 본인의 인맥을 동원하며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아끼지 않으셨다.
그 인연으로 이날의 모임은 'Again 2005'였다. 당시에 우리는 각자의 이유로 각자의 자리에서 조직의 부서장들과 갈등했고 그럴 때마다 회사 근처의 조그만 술집에 모여 분노를 표출하곤 했다. 그 자리에 거의 빠지지 않고 모였던 멤버가 속칭 'OOO 박사와 독수리 5형제'였다. 아무튼 3년 남짓한 시간 동안 온갖 영욕을 함께 했던 우리는 그 뒤로도 간간히 모임을 하며 인연을 이어왔으나 언젠가부터 소원해져 나를 제외하고는 그분을 찾는 이가 없었다. 아니 대부분 각자의 이유로 그분에 대해 안 좋은 감정을 갖고 있었다.
예를 들면 이런 거였다. 한 녀석은 당시 조직에서 발탁되어 독수리 5형제(?) 중에 가장 먼저 팀장을 달았지만 1년 만에 보직을 내려놓아야 했다. 그 이유가 OOO 박사에 대한 회사의 견제라고 녀석은 생각했다. 당시에 그 녀석은 회사의 조치에 분노하면서 1년 정도 후에 더 큰 조직으로 이직했다. 그런데 녀석에겐 OOO 박사에 대한 서운함이 2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남아있었다.
이와 비슷한 이유들로 그들은 OOO 박사와 애증의 관계였던 것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부름에 한걸음에 달려왔다. 나는 여기서 의문이 들었다. 그들이 OOO 박사와 감정의 앙금이 어느 정도 남아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한 때 꽤 깊은 인연을 맺은 이가 정년퇴임을 했으니 나는 총대를 메고 나머지를 불러모았는데 걱정과 달리 그들이 순순히 아니 더 적극적으로 모임에 참석하겠다고 응해왔던 것이다.
그러나 모임 세 시간 만에 나는 그 이유를 알게 되었고 이 모임을 주선한 나 자신의 철없는 행동을 후회했다. 그 녀석들을 보고 싶다는 OOO 박사의 말을 외면하지 못했던 것이지만 그들은 그 자리에 나를 보러 온 것이었다. 그렇게 그날의 자리는 주객이 뒤바뀌었고 나는 씁쓸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술자리 막판에 나를 가장 힘겹게 했던 일은 지난 몇 년간 내게 힘든 가정사가 있다는 사실을 건너 건너 들었던 녀석의 반응이었다. 그는 내 두 번의 휴직을 황색언론의 파파라치처럼 쪼으고 싶어 했다. 그들이 그날 내내 쏟아낸 이야기의 대부분은 20년 전에 대한 각자의 기억이었고 그것은 자기 합리화로 점철이 되어있었다. 그 이야기의 진실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 힘겨웠던 시간을 놀라운 자기의 능력으로 극복해 내었다고 믿었다. 그들의 자존감은 그렇게 보존되어 있었다.
모두로부터 과거에 대한 기억에서 가장 탁월하다는 평가를 받아 온 내가 그들이 말하는 사건의 진실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유를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나의 결론은 단순했다. 나는 그들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모자라지 않는 풍상을 겪었지만 그것을 굳이 들쑤시고 싶지 않았고 그 더러운 경험이 지금의 나에게 자양분이 되었다고 애써 믿으려 한다. 이게 아주 시건방지지만 나의 결론이었다. 그들이 과거의 기억을 더듬어 아픈 상처를 회상하는 이유는 그때의 사건이 오늘날 자기에게 미친 부정적인 결과의 진범이라는 확신이었다. 그것이 그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 따위 이유가 현실의 어려움을 위로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들의 뒷모습은 당당한 앞모습과 달라 보였다. 나는 50대 초반의 대한민국 중년이 모두 이렇지는 않을 것이라 믿고 싶지만, 그들은 직장에서 가정에서 사회에서 위태롭게 서서 더 위태롭게 자신을 합리화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예외일 리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