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직일기, +67일(2021. 7. 8)
노안이 온 지는 꽤 되었다. 처음엔 서류를 검토하거나 휴대폰을 봐야 할 때 안경을 벗고 보면 그만이었다. 다소 불편하긴 하였지만 크게 번거로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데 얼마 안 지나 돋보기 없이는 이조차도 어려운 지경이 되었고 급기야 다양한 종류의 돋보기안경이 집안과 사무실 책상 곳곳에 출몰하기에 이르렀다.
불편한 건 못 참는 성격을 타고난 탓에 어떻게 하면 작업의 효율성을 높일 수 있을까 고심하다가 고정식 돋보기, 접이식 휴대용 돋보기안경, 근시 안경 위에 덧대어 쓰는 덮경, 안경 안에 걸쳐 쓰는 다리 없는 돋보기안경 등등 인터넷을 이 잡듯 뒤져 구매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돋보기 없이 살던 시절에 비하면 그 번거로움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가는 세월을 그 누구가 잡을 수 있으랴.
젊었을 때 나이 드신 상사들이 회의 중에 안경을 선글라스처럼 머리 위에 올리고 문서를 읽는 모습을 보며 좀 우스꽝스럽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그러나 안경 위에 반절쯤 잘린 돋보기안경을 덧대어 쓴 내 모습에 비할 바가 아닐 것이다. 노안은 숨길 수 없는 필연적인 현상이고 나도 부끄럼 없이 이를 받아들이려 한다.
그렇게 조금씩 노안에 적응해 가고 있지만 가끔 나이 먹는 서러움을 다시 일깨워주는 일이 있으니 바로 휴대폰의 터치스크린이 그것이다. 난 스마트폰으로 대변되는 터치스크린 만능의 시대를 진작부터 거부하였다. 글을 손으로 꾹꾹 눌러쓰던 아날로그 새대의 감성을 예찬하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어찌 물리적 자판의 타격감을 터치스크린이 대체할 수 있겠는가. 기계식 키보드를 선호하고 자판을 한 자 한 자 누를 때 느껴지는 감각과 소리를 터치스크린이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제아무리 증강현실이니 가상현실이니 하면서 사이버 세계와 현상계의 경계가 모호해진다고 하여도 말이다. 그래서 스마트폰이 대세를 이루기 시작했던 시절에도 나는 물리 자판이 있는 블랙베리를 고집했다. 블랙베리의 자판과 트랙볼은 반토막난 화면 크기를 상쇄하고도 남았다. 그런 블랙베리도 대세를 이겨내지는 못하였고 여러 차례 모델 변화를 시도하다가 단종되었다. 브랜드가 중국 회사로 넘어가면서 명맥은 이어져 온다고 했지만 예전의 그 폰은 아닐 거라 짐작하고 결국 나도 대세에 몸을 의탁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2~3년 전 블랙베리 키원 모델을 우연히 접하고 마음이 바뀌어 어렵게 공기계 하나를 구했다. 다시 물리 자판으로 카톡 메시지를 보내면서 난 잠시나마 희열감에 사로잡혔다. 키감은 여전하였고 터치스크린에서 속출하였던 오타가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의도치 않게 보내는 메시지에 오타가 날 때마다 자괴감에 빠져들었던 과거는 안녕을 고했다. 그러나 블랙베리가 고유의 운영체계를 포기하고 안드로이드 OS를 탑재하면서 대중화되었어도 잘 나가는 최신 스마트폰의 기능과 디자인을 따라가진 못했다. 불편함은 의외의 곳에서 자주 발생하였다.
결국 나의 블랙베리는 채 2년이 안되어 최신형 아이폰으로 교체되었다. 가끔 안드로이드폰이 필요할 때 블랙베리를 사용하긴 하지만 배터리 수명이 짧아져 그마저 안 하게 될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난생처음 아이폰을 쓰면서 터치스크린 자판이 생각보다 많이 개선되었다는 것을 새삼 느낀다. 물리적 키보드의 타격감을 재현할 순 없지만 오타는 생각보다 많이 줄었다. 급하게 카톡 메시지를 보낼 땐 여전하지만 지금의 이 글도 휴대폰으로 작성하고 있으니 놀라운 발전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렇게 나도 신기술과 대세에 적응해 가는 중이다. 가상인간이 광고에 등장하고 인플루언서가 되는 세상에 터치스크린에도 적응하지 못하는 내가 시대에 한참 뒤처진 것이라 할지도 모르지만 모든 기술은 인간에게 유용함을 제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은 얼리어답터나 신세대를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요람에서 무덤까지 그 사이에 생존해 있는 모든 인간을 말한다. 그런데 터치스크린이 적용되는 모든 서비스는 기술을 따라잡지 못하는 인간을 탓하고 있다. 나조차도 햄버거 매장의 무인 주문시스템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다.
기술의 정의는 인간의 목적(필요)을 달성하기 위해 자연을 조작(manipulation)하는 것이다. 이것이 과학과 기술의 차이다. 과학에는 인간이 없다. 그저 자연현상과 법칙을 발견하고 규명하는 것이 과학이다. 그런데 기술은 인간을 위해 과학을 이용하는 것이다. 내가 어렸을 적 모 가전제품 회사의 광고에서는 인간을 위한 기술이라는 캐치프레이즈를 걸고 휴먼테크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과연 오늘날의 기술과 서비스가 인간을 향하고 있는지 궁금해졌다.
오늘의 감상,
근시가 심하지 않아 집에서는 안경(다초점)을 잘 안 쓰는 편인데 항상 휴대폰을 보아야 할 때가 말썽이었다. 매번 돋보기를 쓰는 게 불편하여 다소 민망함을 무릅쓰고 디스플레이 설정에서 글자크기와 화면을 최대로 확대하였다. 그랬더니 돋보기 없이도 웬만한 글은 큰 불편 없이 읽을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엉뚱한 곳에서 발생했다. 모든 화면이 표준 크기에 최적화되어 있었기 때문에 내가 클릭하고 싶은 아이콘이 화면 끝에 걸린 경우 아무리 터치를 해도 인식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터치스크린을 잘 사용할 줄 모른다며 놀려댔다. 난 졸지에 신세대 아빠에서 할아버지가 되었다. 내 나이와 노안이 부끄럽진 않았지만 아이들의 놀림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터치스크린에 적응하지 못하는 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그런데 세상은 급변하는 최신 기술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간을 낙오자라 칭한다. 주객이 바뀌어도 한참 어긋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