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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마스에는

작은 소망들이 피어날까?

by 낙산우공

1991년 이후 나에게 크리스마스는 아버지를 기억하는 날이 되었고, 2022년 이후에는 잃어버린 내 아버지를 기억하면서 잃어버릴 뻔했던 내 아들을 챙기는 날이 되었다. 어제는 아들과 함께 서울 근교에 모신 아버지를 뵙고 돌아왔다. 그 자리에서 그간 평안하신 지를 여쭙고 여전히 평안하지 못한 내 아들을 지켜봐 달라는 부탁의 말을 남기고 말았다. 염치없게도.


고등학교 1학년 2학기부터 학교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천신만고 끝에 졸업장을 받은 내 아이는 올 한 해를 통째로 쉬었다. 3년간의 우울증 투병기록 덕분에 병역판정검사에서 보충역 처분을 받았고 그래서 군대 끌려가는 악몽에서 겨우 벗어난 것이 올해의 가장 큰 수확이라면 수확이다.


아이가 원해서 준비했던 독일유학도, 가죽공예도 오래가진 못했다. 어떤 일에도 마음을 붙이지 못하고 병원처방과 심리상담으로 겨우겨우 버려질 시간들을 채워나가던 아이가 엄마와 함께 천주교에 입교하여 정식 신자가 되기 위한 절차를 밟아나간 지 두어 달이 되어간다. 무어라도 손에 잡고 마음을 붙이면 다행으로 여기며 산 지 벌써 네 번째 해를 맞고 있다.


천주교 부설 유치원을 다녔던 아이는 가톨릭 성당의 분위기를 좋아했다. 대인관계가 어려운 아이가 신부님과도 곧잘 대화를 나누었다. 그러다가 종교사를 연구하는 신학자가 되고 싶다며 대학입시에 도전할 뜻을 비추었을 때만 해도 나는 서서히 아이를 일으켜 세울 준비를 해야겠다고 다짐하며 이것저것 알아보기 시작했다. 아이는 스스로 무언가를 찾아서 해내는 일에 서툴렀고 그 일은 언제나 내 몫이었다.


미술계열 고등학교를 다녔고 그나마 2년은 출석도장만 찍었던 아이는 내신성적이라고 할 수 없는 성적표를 받았다. 학교 시험에 한 번도 응시하지 못한 아이에겐 졸업장도 과분한 것이었다. 그러니 인문계열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모든 과목을 새롭게 공부해야 한다는 계산이 나온다. 공부에 소질이 없어 재능을 보인 미술을 전공하게 되었던 아이는 다시 인생의 새로운 도전을 계획한 것이다.


그런데 이 아이에겐 아직 책 한 권도 꺼내 읽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아니 책에 관심을 보인 기억조차 없었다. 그런 아이를 억지로 밀어붙일 일이 아니기에 나는 말없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아이가 얼마 전 서울대에 합격한 사촌여동생의 소식을 듣고는 진로를 바꾸었다. 시작도 안 한 신학과 입시가 아니라 언감생심 "S대" 철학과를 가겠다고 한다. 3년이 걸리든 4년이 걸리든 꼭 SKY대학을 가서 보란 듯이 공부를 하겠단다.


이 아이는 여전히 타인의 시선과 인정에 목말라 있다. 이 아이가 그리워하는 타인은 대부분 자신 외에 아무에게도 관심이 없다는 사실을 아이는 깨닫지 못했다. 타인의 시선과 관심보다 자신의 삶이 중요하다는 것을, 타인의 인정과 평가보다 스스로의 만족을 찾아야 하는 것을 아이는 아직 모른다. 그것이 쉽게 터득되는 것이 아님을 잘 알지만, 언젠가는 이 아이가 스스로 자신에게 집중하는 날이 오기를 나는 말없이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안타까움이 타인을 변화시키진 못했다. 설득이 누군가를 변화시키지도 못한다. 이 아이의 방황도, 좌절도, 희망도, 의지도 이 아이의 몫이었다. 자신에게 없는 것을 탐하고 자신이 가진 것을 알아채지 못하는 인간을 두고 어리석다고 한다. 그런데 사실 인간은 모두 어리석다. 다만 그 어리석음에서 깨어나는 인간과 영영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이 있을 뿐이다. 나는 내 아이도 나와 같을 것이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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