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혈압이라니

휴직일기, +92일(2021. 8. 2)

by 낙산우공

가족력이 있는 고지혈증으로 3년 전부터 약을 복용하고 있다. 콜레스테롤보다는 중성지방 수치가 기준치에서 심각하게 벗어나 있는 편이라 몇 가지 약을 다량 복용하다가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적인 수준으로 유지되고 있다. 약도 전보다는 약한 것으로 매일 한알씩만 먹고 있다. 3대 성인병으로 일컬어지는 고혈압, 고혈당, 고지혈 중 나는 한 가지를 아주 오랫동안 앓고 있으며 최근에는 당뇨 수치도 기준치를 넘어섰다는 진단을 받았다.


중성지방은 꽤 오래전부터 높은 수준을 유지했으나 주치의는 술을 줄이는 대신에 식습관 개선과 운동을 권하면서 절대 약 처방을 해주지 않았다. 의사의 처방은 매우 상식적이지만 밀가루 음식을 과도하게 좋아하고 좋은 안주에 곁들인 가벼운 음주를 심각하게 사랑하는 나에게는 비현실적인 요구였다. 더구나 움직이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하는 나의 성향 상 꾸준한 운동은 그야말로 단백질 위주의 식단만큼이나 지키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정기적인 건강검진 때마다 걱정스런 잔소리를 반복해서 들어오다가 급기야 약 처방 없이는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르고야 말았다. 정확한 숫자는 기억나지 않지만 기준치의 약 세배 가까운 결과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나는 중년의 성인병을 달고 사는 처지가 되었으며 아마도 평생 고지혈 약을 끊을 기회는 없을 것 같다. 식이요법과 운동을 통해 체질을 완전히 변화시키지 않는 한 말이다.


고지혈 약을 먹고 나니 중성지방과 콜레스테롤 수치는 놀라울 정도로 정상범위 내에서 유지되고 있다. 특히 탄수화물에 중독된 나에게는 식사 때마다 느끼던 죄책감과 부담감을 덜게 되어 마음이 한결 가볍다. 그런데 왜 담당의사는 매번 약 처방을 망설였던 것일까? 하루에 알약 하나 챙겨 먹는 것이 그리 번거로운 일도 아닌데 말이다. 그 이유를 알게 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약을 복용하기 시작하면서 내 몸에는 다양한 변화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처음엔 근육통이었다. 특별히 과격한 운동이나 노동을 한 적이 없는데 이상하게 몸이 찌뿌둥하고 무엇엔가 맞은 것처럼 뻐근해 왔다. 알고 보니 고지혈약 부작용이었다. 초기에 올라갈 대로 올라간 중성지방 수치를 낮추기 위해 복용하기 시작했던 약은 두 종류였고 아침, 저녁 두 차례나 챙겨 먹어야 했다. 상대적으로 약효가 강한 약을 처방받은 탓에 부작용도 남다른 편이었고 나는 두 달간 컨디션 난조를 겪어야만 했다. 그렇게 높은 고지혈 수치를 어느 정도 낮춘 후에는 약효가 조금 덜한 약을 처방받았는데 문제는 미각에 영향을 주는 바람에 입맛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몇 차례 약 종류를 변경하면서 내 체질에 맞는 약을 찾기까지는 6개월 넘는 시간이 소요되었고, 그 사이 나는 다양한 부작용에 노출되었다. 한때는 술맛을 잃어버려 슬퍼해야 했고 한때는 간수치가 오르면서 간 기능 개선제를 장복해야 했다. 우여곡절 끝에 간 기능도 제 상태로 돌아왔고 입맛이나 술맛이 예전 같지는 않아도 사는데 크게 지장은 없다. 하지만 고질적인 질환으로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게 결코 달가운 일이 아니란 것을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생활습관 개선을 통해 몸의 건강상태를 유지하는 일이 어째서 중요한 것인지 이제야 알게 된 것은 역시 세월을 이기는 지혜가 없다는 걸 다시 한번 입증한 것 같아 씁쓸할 뿐이다.


흔히 대사증후군이라고 불리는 중년의 성인병을 자연스럽게 겪으면서 고지혈과 고혈당을 넘어 곧 고혈압에 진입할 것이라는 예측을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수순 같았다. 시기는 다르지만 내 어머니도 예순을 넘으시면서 이 세 가지 성인병 치료제를 달고 사셨다. 지난해 건강검진에서도 혈압이 다소 높다고 하여 검사 말미에 다시 측정하여 겨우 정상수치로 돌아왔다.


그런 내게 휴직 후 3개월 남짓 지난 최근의 변화는 놀라울 뿐이다. 휴직하고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고지혈약 처방을 위해 주치의를 찾았다. 큰 변화가 없을 때는 6개월에 한 번 피검사를 하지만 약을 받기 위해 두 달에 한 번은 병원을 찾는다. 의사는 최근의 컨디션을 묻고 약 부작용이 있는지 확인한 후 의례적으로 혈압을 잰다. 이날은 오른팔, 왼팔을 번갈아 가면서 무려 네 번이나 혈압을 측정하였다. 이상한 낌새를 느꼈지만 혹시 고혈압이 온건가 하는 의문이 든 정도였다. 그런데 결과는 놀랍게도 평생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저혈압 판정이었다.


보통 젊은 여성들에게 많이 보인다는 저혈압이 성인병 초입의 중년 남성에게 나타날 확률이 얼마나 되는지 모르나 의사는 3년간 나의 혈압을 재면서 이 결과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저혈압은 병이 아니라는 말을 반복적으로 하면서 혹시 다른 곳에서 처방받아 복용 중인 약이 있는가를 의심에 찬 눈초리로 묻는다. 전립선약이 혈압을 떨어뜨린다는 말과 함께… 오십의 중년 남성에게 전립선 비대증이 흔한 병이겠으나 있지도 않는 병을 들먹이니 답답하다.


두 달 만에 다시 찾은 병원에서 나의 저혈압은 달라지지 않았으며, 담당의사가 내린 최종 결론은 내가 체질적으로 저혈압이었다는 것이다. 과거 혈압 측정에서 한 번도 저혈압이 나오지 않았던 것은 평소 활동량이나 운동량이 많았거나 일시적으로 혈압이 올라간 상태에서 측정했던 것이고 아마도 나는 애초부터 혈압이 낮은 체질이었다는 말이다. 그렇게 믿을 수밖에 없는 결과가 최근 3개월 사이에 나타난 것이다.


이 지점에서 나는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혈압이란 것을 정기적으로 측정한 게 대략 직장생활을 시작한 최근 20년 남짓일 것이고 그때와 지금의 내게 달라진 환경이래야 고작 재직 중이냐 휴직 중이냐의 차이일 뿐이다. 따라서 나는 태생적으로 저혈압인 체질에도 불구하고 직장생활 내내 정상혈압으로 오인된 것이다. 나의 활동량이나 운동량은 휴직 전에 비해 과도하게 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나의 혈압이 본래 상태로 되돌아온 원인은 일을 하지 않는다는 단 한 가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20년 가까이 고지혈에 시달리다가 급기야 고혈당까지 찾아온 중년의 남자가 본인의 저혈압 체질을 깨닫고 기립성 빈혈을 걱정해야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리고 나의 저혈압을 해결하는 방법은 둘 중 하나다. 열심히 운동해서 혈압 수치를 높이거나 직장에 다시 복귀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나는 전립선 비대증에 걸려도 치료받을 수 없을지 모른다.


도대체 직장은 어떻게 나의 저혈압을 관리해 준 것일까? 나는 이것을 감사해야 하는 것일까?




오늘의 감상,

이제 나는 잠자리에서 일어날 때부터 심호흡을 하고 스트레칭을 한 후 벌떡 일어나지 않도록 주의하면서 무릎을 꿇고 주위의 무언가를 짚은 채 아주 천천히 일어난다. 만약에 발생할지 모르는 의식불명의 낙상을 걱정하면서 말이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222일이 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