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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낙산우공 Aug 06. 2021

온기를 나누다

딸아이의 후드(2016. 10. 26)

날씨가 부쩍 추워졌다. 도무지 아침마다 옷을 어떻게 챙겨 입어야 할지 고민이 되는 계절이다. 날은 추워졌는데 땀을 자주 흘리는 건 변덕스러운 날씨 탓이다. 그래도 지긋지긋한 여름이 지나간 것은 반가운 일이다. 이렇게 또 한 해를 넘기는 건가. 겨울잠을 준비하는 동물들의 마음이 이런 것이 아닐까. 굶어 죽을 수도 있는 동면기간을 버티는 일이 그들에게 중요한 연례행사이듯 끔찍한 더위 한철을 견디는 일이 나에겐 그러하다.

추운 날씨 탓에 우리는 거실에 카펫을 깔고 창가에 커튼을 친다. 어머니 집 창문에 붙여드린 방한용 비닐이 아직 그대로인데 벌써 한 해가 지났다. 카펫이나 커튼이나 비닐 모두 우리에게 온기를 준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그립던 시절이 언제였냐는 듯 우리는 온기를 찾기 시작했다. 어제 밤늦게 학원을 마친 큰아이를 데리고 오는 길에 두툼한 후드 집업을 입고 있던 딸아이가 물었다.

'아빠, 내 후드 모자 밑에 손을 넣어봐, 따뜻해?, 오늘 학교에서 애들이 자꾸 내 모자 밑으로 손을 넣어'

아이의 말대로 무심코 모자 밑으로 손을 넣자 따뜻한 온기와 함께 딸아이의 등판이 느껴졌다. 아주 오랜만에 경험해 보는 딸아이와의 스킨십이었다. 그리고 여중 1학년 아이들이 장난스레 우리 아이 모자 밑에 손을 넣는 상상을 해 보았다.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그 아이들은 손이 시리기도 했겠지만 그렇게 딸아이의 등을 만지면서 서로의 온기를 나누었을 것이다. 별 일 아닌 듯 보이는 이런 행동이 사실은 아이들만이 나누는 아름다운 일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 큰 어른들은 서로 손을 어루만지고 어깨를 쓰다듬지 않는다. 이성 간에 이랬다가는 큰 곤욕을 치르기도 하지만 동성 간에는 오히려 그럴 엄두조차 내지 않는다. 어른들 사이에서는 그래야 할 필요도 그러고 싶은 마음도 느끼지 못하는 것이다. 온기를 나누는 행위는 가족과 연인들 사이에서나 있을 법한 일이 되었다. 아마도 프리허그의 등장은 이러한 세태가 투영된 현상일 것이다.

며칠 전 딸아이는 아침에 30분 일찍 등교해야 한다고 부산을 떨었다. 알고 보니 당번처럼 돌아가면서 학교 현관에서 모든 학생들과 프리허그를 한다는 것이다. 아이에게 프리허그를 왜 하는지 물으면서 속으로 이 아이들에겐 이런 일이 필요하지 않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들은 모두 자발적으로 체온을 나누는 삶을 누리고 있지 않은가.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겨울 나의 아버지는 교통사고로 세상을 등지셨다. 천붕이라는 말처럼 마른하늘의 날벼락같은 사고에 우리 가족 모두는 충격과 공포에서 헤어 나오지 못했다. 고작 스무 살의 대학 신입생이었던 나는 아무 의식도 없이 문상객들을 맞고 있었다. 그때 아버지의 외숙모 되시는 할머니께서 내게 다가와 내 등과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면서 나를 보듬어 주셨다. 어릴 적 가끔 아버지를 따라 명절에 인사를 드리러 가곤 했지만 그분은 나에게 낯선 분이었다. 처음엔 그분의 그런 행동이 부담스러웠다. 그런데 차차 그 손길과 그 손길을 통해 전해오는 따뜻한 온기가 차갑게 얼어붙은 내 마음을 녹이기 시작했고 나는 급기야 긴 울음을 쏟아내고 말았다.

큰 아이가 처음 태어났을 때 목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아이를 안아주는 일은 쉽지 않았다. 늘 불안 불안해하면서 한 손으로 아이의 뒷목을 받쳐주곤 했다. 그런데 언제인가부터 딸아이는 안아줄 때마다 뒷목을 받치는 내 버릇을 따라 하기 시작했다. 서너 살이 되었을 무렵에도 퇴근해 돌아온 나에게 안기는 딸아이는 항상 내 뒷목이나 뒤통수를 조막만 한 제 손으로 감싸는 것이다. 그 손길이 처음엔 당황스러웠지만 이내 너무나 따뜻하고 안락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조그만 손에 내 목을 지탱하는 힘이 있을 리 없지만 그 감촉과 온기만으로도 나는 진정 행복했다.

그 아이가 이제는 내게 손끝도 허락하지 않지만 말이다. 아주 가끔은 내 어깨를 주무르고 더 아주 가끔은 내 볼에 입을 맞추는 것으로 만족하며 산다. 어릴 적 날마다 내 목과 뒤통수를 감싸주던 그 고마운 손길을 기억하면서 말이다.




몇 주째 폭염이 기승을 부리는 한여름에 뜬금없는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온기를 나누지 않으면 가족이 아니다. 입추를 하루 앞두고 올 겨울을 기대해 본다. 입시에서 해방된 아이들과 원 없이 온기를 나누어 보기를… 겨울은 가족끼리 모이라고 하늘이 내린 선물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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