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드론

Padron

by 별작가

오늘은 산티아고 대성당에 입성하기 전 마지막 머물게 될 동네 '파드론'까지 약 20km를 걸었다. 오늘도 익숙한 듯 낯선 풍경을 온전히 느끼며 걸었다. 마지막이 다가온다는 생각에 한걸음 한걸음이 소중했다.

이제는 나보다 훨씬 잘 걷는 유림이가, 굳이 내 속도에 맞추지 않고 혼자 앞서서 걷는다. 서로가 안 보일 정도로 멀어져도 당황하지 않는다. 우리가 약속한 이 길로 걷다 보면, 반드시 만나게 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유림이가 먼저 걸어가 버려도, 나는 내 속도대로 걷는다. 그러다 보면 고양이와 인사하고 있는 유림이를 만나거나, 그네를 타고 놀고 있는 유림이를 만나게 된다. 포도밭 길을 지나고, 옥수수밭 사이를 걷는 순간마저 그리워질 거 같아 유림이의 뒤를 따라가며 열심히 사진도 찍어 본다.

보통 산티아고 입성 전 마지막으로 머물렀다 가게 되는 '파드론'은 산티아고 대성당에서 25km 정도 떨어져 있다. 그래서일까? 이 마을에 머무는 사람들에게서 설렘이나 기대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 출발지는 모두 다양했지만, 내일이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는 똑같은 꿈을 품은 사람들. 내일 그곳에서 우린 어떤 기분을 느끼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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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걷는 길도 얼마 안남았다는 생각에 유림이가 걷는 모습을 열심히 사진에 담아 봤다.




오늘 묵게 된 숙소는 무료 세탁 서비스가 있는 곳이었다. 매일 빨래를 해야 하는 지친 순례자들에게는, 이 숙소에 반드시 머물러야 하는 이유가 될 정도의 특급 서비스인 것이다. 우리가 개운하게 씻고, 빨래를 맡기고, 짐정리를 대충 마쳤을 때쯤이었다. 검게 그을린 피부과 짧은 커트머리, 무척이나 피곤해 보이는 표정의 젊은 여성이 방에 들어섰다. 그녀는 많은 침대 중에 우리와 가까운 침대를 배정받았다. 짐을 풀려고 내려놓은 배낭에 달린 선명한 태극기를 보고 그녀가 한국인임을 눈치챈 순간, 나와 눈이 딱 마주쳤다.


“와~ 한국인이세요?”


한국인이냐고 묻는 질문 앞에 감탄사가 붙는 걸 봐서, 그녀도 이 길 위에서 한국인을 어렵게 만난 거라는 게 바로 느껴졌다.


“네~ 저랑 제 딸이에요. 여기서 한국인 만나니까 너무 반갑네요. 혼자 걸으시는 거예요?”


“네. 혼자 걷다가, 만나게 되는 사람들과 친구가 돼서 같이 걷다가 해요. 하하하!”


사람 좋은 털털함이 느껴지는 웃음소리였다. 그녀의 이름은 '해리'라고 했다. 집이 제주도라고 해서 유림이와는 '제주언니'로 불렀다. 제주언니는 스물여섯 살이라고 했는데, 훨씬 어려 보여서 처음엔 대학 1, 2학년쯤 된 학생이 방학을 이용해서 순례길을 걸으러 왔나?라고 생각했었다. 낯가림이라는 단어는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밝아 보이는 모습이 참 좋아 보였다. 타지에서 고향사람 만난 것처럼 반가웠던 우리는 저녁을 함께 먹기로 했다.

우린 꽤 유명한 타파스 식당을 알아냈고, 웨이팅까지 하며 어렵게 테이블에 앉을 수 있었다. 다 맛있어 보이는 메뉴들 때문에 선택장애가 왔지만, 제주언니가 신속한 메뉴 추천과 거침없는 스페인어로 주문까지 완벽하게 해 버렸다. 우리처럼 생존 스페인어를 익힌 것뿐이라고 했지만, 제주언니의 스페인어 수준은 우리와 비교할 수준이 아니었다.

음식은 환상 적이었고, 서로 와인 취향도 잘 맞아서 여러 잔을 주문해서 마시게 됐다. 정신이 알딸딸하게 술이 들어가니 분위기가 무르익어가, 진솔한 속 얘기까지 할 수 있었다.


“해리 씨는 순례길을 걷는 특별한 이유가 있어요?”


“우리 막내 이모 때문에 걷는 거예요.”


“네? 막내이모 때문에요? 무슨 일인데요?”


“너무 젊고 건강했던 이모가 작년에 갑자기 돌아가셨거든요.”


그녀는 제주 사범대 학생인데, 미국 학교와 연계된 학위 취득을 위해 미국으로 가야 한다고 했다. 그때까지 시간여유가 좀 있어서, 산티아고를 걷고 마드리드로 건너가서 거기서 미국으로 넘어가는 계획이라고 했다. 그리고, 스물여섯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다시 수능을 보고 의대를 갈 계획이라고 했다. 병원에서 갑자기 돌아가신 막내이모의 사건이 그녀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었고, 그 이유로 의대를 갈 결심을 했다고 한다. 순례길을 걷는 동안 만나게 되는 모든 성당에 들어가서 막내이모를 위해 기도를 올렸다고도 했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이유로 순례길을 걷고, 저마다의 이유로 인생을 살며, 각자에게 중요한 선택들을 한다. 어떤 선택이 좋은 선택이고 나쁜 선택인지는 알 수 없다. 그녀는 자신만의 이유로 자신만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유림이와 내가 우리의 이유로 순례길을 걷고 있는 것처럼, 이 길 위에 모든 이들도 자신만의 이유로 자신만의 인생을 선택하기를 기도해 본다.


얼큰하게 취한 제주언니와 나는, 내일 함께 산티아고에 입성하자고 약속하며 와인을 한잔 더 주문했다. 이제 그만 마시라고 옆에서 노려보는 유림이의 시선이 따가웠지만, 술친구와 함께 신나게 얘기 중인 나는 그 시선을 애써 무시했다.


드디어 내일이면 산티아고다.


KakaoTalk_20241201_181347480_02.jpg 제주언니와 함께 했던 타파스 식당. 맥주로 시작해서 와인으로 끝난 이 날이 그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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