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das de reis
오늘도 우리는 익숙한 통증과 함께 걷고 있다. 20km 정도를 걸어 '칼다스 데 레이스'까지 걸을 예정이다. 이제 20km 정도는 기본으로 걷는 거라 엄청 힘들게 느껴지진 않는다. 하지만, 그동안의 피로와 통증이 하루씩 더 누적되고 있는 느낌이 들었다.
걷는 중간중간 구글맵을 이용해서 카페나 식당, 숙소 등의 시설을 검색하고, 식사와 휴식할 장소를 결정했다. 오늘도 늘 그렇듯 도착지에 어떤 식당이나 마켓이 있는지를 검색하며 걷고 있었는데, 반갑게도 우리가 예약해 둔 숙소 근처에 아시아 식료품점이 있는 것이다. 마켓의 추가 정보를 얻기 위해 손가락으로 화면을 터치했고, 그 순간 나의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그 식료품점 사진 안에서 한국 라면의 빨간색 포장지를 보게 된 것이다. 마트 진열장 안에 깨알같이 작게 보이는 사진이었지만, 나는 확실히 알아볼 수 있었다. 그건 분명 '신라면'이었다.
“유림아~ 우리가 오늘 머무는 숙소 근처에 신라면을 파는 아시아 마켓이 있어. 꺄~ 신난다!”
“엄마~ 진짜 좋아! 나 두 개 먹을 거야. 빨리 가자!”
걸을 때마다 느껴지던 통증이 갑자기 사라지는 마법을 경험했다. 발걸음이 빨라졌고, 다리에 힘이 붙었다.
우리가 한국을 떠나온 지 보름이 넘은 때였고, 그동안 짜거나 느끼한 타국음식을 주로 먹은 탓에 우리나라의 얼큰한 라면국물이 말도 못 하게 간절한 상황이었다. 유림이와 나는 오늘 저녁메뉴로 무조건 신라면을 먹겠다는 목표 하나로 힘차게 걸어서 숙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숙소에 짐을 풀자마자 식료품점으로 출발했다. 상점은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었고, 혹시 한국분이 하시는 상점이 아닐까 기대했는데 카운터에 계신 분은 중국분인 것 같았다. 상점 안에 물건들도 거의 중국과 다른 아시아 음식들이 많았다. 진열장 속 빼곡한 타국 제품들 중에, 위풍당당 유일한 한국라면이 딱 보였다. 한국 금액에 비하면 말도 못 하게 비싼 가격(컵라면 한 개에 3.5유로)이었지만, 지금 가격이 뭣이 중헌디?
햇반이나 김치도 하나 있으면 금상첨화겠다 싶어 상점 안을 두 바퀴나 돌며 찾아봤지만, 신라면이 유일한 한국음식이었다.
‘이게 어디냐. 더 욕심부리지 말자.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감사기도가 절로 나왔다.
라면과 함께 물도 사고, 빵도 사고, 음료수도 사서 룰루랄라 숙소로 돌아오던 길에, 납작 복숭아를 사려고 숙소 일층에 있는 과일가게로 들어갔다.
우리는 육식파다. 그래서 과일을 잘 안 먹는다. 싫어하는 건 아닌데, 고기 먹기에 바빠서 과일까지는 잘 안 챙겨 먹게 된다. 그런 우리가 스페인에 와서 꽂힌 것이 있었으니, 바로 '납작 복숭아'와 즉석에서 착즙 해주는 '오렌지주스'다.
신라면 먹고 후식으로 납작 복숭아를 먹겠다는 완벽한 플랜을 세우고, 유림이 거 내 거 사이좋게 납작 복숭아 두 개를 비닐봉지에 담아 계산대로 갔다. (우린 과일을 절대 많이 사지 않는다. 하하하!)
내 앞에 스페인 할아버지가 과일을 아주 잔뜩 담아서 계산을 하려고 하고 계셨다. 할아버지는 내 왼손에 조촐하게 들려있는 비닐봉지를 슬쩍 보시더니, 계산원에게 이 사람 먼저 계산해 주라는 듯 뭐라 말씀을 하셨다. 계산원은 내 복숭아를 먼저 달라고 하더니 저울에 무게를 잰 후, 내가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스페인어로 뭐라 말을 했다.
“네? 얼마라고요?”
이번에는 내 앞에 할아버지를 가리키며 뭐라고 말을 했다. 난 그제야 눈치를 챘다.
‘아! 아까 이 할아버지가 우리 복숭아까지 같이 계산하겠다고 말한 거였구나.’
이제는 할아버지까지 나서서 우리에게 그냥 가져가라고 하셨고, 우린 ‘아니에요~ 괜찮아요~’라고 말했지만, 할아버지는 내가 사 줄 테니 복숭아를 더 많이 담으라고 하셨다.(우린 서로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태였지만, 이 때는 정말 뭐라고 말하는지 서로 다 알아들었다.)
나는 몇 번 더 사양했지만 할아버지께서 진짜로 과일을 더 사주실 분위기여서,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복숭아 두 개만 들고 후다닥 가게를 빠져나왔다. 복숭아 두 개였지만, 그보다 훨씬 더 값비싼 마음을 선물 받은 것 같아 가슴이 따뜻해졌다.
빨래도 하고, 푹 쉬다가 저녁이 되자 숙소 주방에 우리의 저녁만찬이 차려졌다. 주인공 신라면과 천사 할아버지께 선물 받은 납작 복숭아를 차려놓고 전기포트에 물을 끓였다. 우린 컵라면에 물을 붓고 결국 삼분을 기다리지 못했다. ‘면은 꼬들꼬들한 게 맛있지~’ 라며 서둘러 뚜껑을 벗겨냈다.
아! 오랜만에 먹은 한국라면 맛은 정말 환상적이었다. 분명 똑같은 라면일 텐데, 한국에서 먹었던 그 라면이 아니었다. 말이나 글로는 절대 표현할 수 없는 그 '한국라면 맛'에 우리는 최고로 행복한 저녁을 보내게 되었다. 국물 한 방울 남기지 않고 다 마신 후 맛본 납작 복숭아의 맛 또한 최고였다.
이날 우리의 저녁식사는 정신적으로 충만해지는 감사한 식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