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사랑니의 공통점에 대하여
1. 오래 썩힐수록 아프다
처음 사랑니가 나오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무려 네개나), 병원에서는 당장 뽑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발치라는 것이 간단한 일도 아니고, 나중에 이 사랑니가 문제를 일으키거나 통증을 유발하면 그 때 가서 제거해도 된다고 했다.
당시에는 그게 참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일을 대비하기 위해 미리 멀쩡한(?) 사랑니를 뽑아버리는 건 괜한 고통과 리스크를 감수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사실은 작년부터 양쪽 턱 주변 근육에서 미세한 경련이 일어나곤 했는데, 심하진 않아서 그냥 두었더니 점점 빈도수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나의 고질병이었던 척추측만+어깨통증에서 이어진 새로운 증상인가 싶어서 한의원도 다니고 운동도 열심히 해봤다. 하지만 효과는 잠시뿐, 치료나 근력운동을 잠시 쉬면 또 다시 일어나기 일쑤였다.
그런 불편함에 서서히 익숙해져가던 중, 여름휴가가 시작되는 첫 날부터 양쪽 어금니 뒤쪽에 염증이 올라오기 시작했다. 그렇게 여행 내내 엄청난 잇몸통증과 두통을 진통제로 억누르고, 서울에 돌아오자마자 치과를 갔더니 글쎄 사랑니 때문에 생긴 염증이라는거다..? 염증이 먼저 잦아든 오른쪽부터 발치를 했더니, 거짓말처럼 턱의 경련이 사라졌다; (물론 발치로 인한 고통은 어마어마했지만)
조금 허탈하기도 하고, 시원하기도 했다.
진작 뽑아버릴걸.
어쩌면 내가 사랑니를 진작 발치하지 않은 이유는,
합리적이고 어쩌고를 떠나 '무서워서'였을 것이라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생니를 그냥 뽑아버리면 너무 아플 것 같아서 무서웠다.
왜, 이미 빠질 준비를 하고 있는 흔들거리는 치아는 뽑기도 쉽고 덜 아프지만
거기가 자기 자리라고 생각하고 꾸역꾸역 자라고 있는 이를 확 뽑아버리면 너무 아플 것 같았다.
그래서, 한참 뒀다가 뽑으니 덜 아팠을까?
아니였다.
오히려 발치의 고통보다, 방치해서 생긴 염증이 주는 통증이 훨씬 컸다.
차라리 염증이 생기기 전에 뽑아버리는 게 덜 아팠을 거다.
(심지어 염증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가 뽑아야 해서 발치과정이 더 번거로워지기까지 했다.)
2. 빠져나간 자리는 균에 매우 취약하므로, 조심해야 한다
사랑니가 오랫동안 터(?)를 잡고 있던 자리가 순식간에 비워졌다. 심지어 하나는 매복니여서, 잇몸을 조금 찢기도 했다. 그래서 더더욱 균이 침투하지 못하게 조심해야 했다. 항생제를 먹고, 소염제도 먹어야 한다. 심지어 작은 과자 가루도 조심해야 한다더라.
왜냐하면 그 자리는 비어있고, 상처도 있고, 취약한 상태니까.
마음의 자리도 마찬가지다.
한 사람이 자리하고 있던 곳을 비워내면, 어떻게든 그 공허한 자리를 채우고 싶어진다.
누군가 나를 조금만 찔러도 거기에 넘어가고 싶어진다.
평소에 하지도 않던 짓을 하고 싶어진다.
나답지 않는 생각을 하게 된다.
이 때를 특별히 조심해야 한다.
그것들이 나를 더 아프게 할 세균들일 수 있으니.
3. 생기는 것도, 사라지는 것도 내가 어찌할 수 없는 것
사랑니가 생기는 건 내가 막을 수 없는 일이다.
사랑니를 없애는 일도 마찬가지다.
이 사랑니가 염증을 일으키고 나를 괴롭히면 어쩔 수 없이 발치를 해야 한다.
그래야 나머지 치아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으니까.
그게 나를 위한 거니까.
사랑도 마찬가지다.
내가 이 사람을 사랑해야지, 하고 사랑하는 게 아닌 것처럼
그 사람을 마음에서 떠나보내는 일도 내 의지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물론 결정은 할 수 있다. 결정을 해야 한다.
하지만 그것이 '8월 1일 12시까지 그 사람을 깨끗이 잊을 것'의 식으로 처리할 수 있는 일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럼에도 받아들여야 한다.
이제는 떠나보내야 한다는 걸.
그래야 내가 아프지 않을 수 있으니까.
그런데, 억울하게도 사랑니과 사랑 간의 큰 차이점이 하나 있었다.
사랑니를 뽑아서 생기는 통증은 진통제로 눌러버릴 수 있지만,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거다.
오롯이 흘려보내고, 느끼고, 견뎌야한다는 것이다.
그 과정에 잠 못드는 밤도 있고, 과음도 있고, 과소비도 있고, 감정의 폭발도 있지만
결국 이 또한 내가 단단해지고 성장하는 과정이 된다는 것 하나는 확실하다.
오는 것도, 떠나가는 것도
모두 나의 일부가 된다는 것을 받아들이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