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기에 대한 생각

나의 가장 내밀한 것을 품은 아이

by 별방구

글쓰기는 마법의 묘약

오늘 하루의 기록은 그저 순간의 기록일 뿐이다. 그러나 하루가 모이고, 쌓이고, 한 달이 되고, 일 년이 되면 그건 순간의 기록이 아니라 삶의 기록이 된다. 차곡차곡 올려가는 한 페이지가 모여 책이 된다는 게 여전히 신기하고, 생경하다. 멀게 느껴지는 것을 멀다 느끼지 않고, 한 걸음씩 가까워지고 있다는 그 어떤 믿음이 만들어내는 힘의 마법이랄까. 내게는 그 믿음이 필요하다. 분명 글을 쓰는 사람에게는 늘 절실하고 간절한 힘일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일기는 가장 쉽게 쌓을 수 있는 이야기 탑이 아닐까 싶다. 그 재료가 쉬이 내게 있으며, 그저 숨을 쉬고 하루를 살아가면 만들어지는 것이니 이보다 쉬운 글쓰기 재료가 어디 있단 말인가. 그러나 문제는 그 재료를 꺼내서 요리를 하는 데 있다.


그냥 펜과 노트, 혹은 핸드폰과 키보드만 있으면 되는 것인데도 손가락과 손목을 움직이고, 생각을 글자로 꺼내는 그 과정에 대한 귀차니즘은 정말이지 약도 없다. 그래서 늘 마음을 다잡으려 노력한다. 오늘도 써야지, 써야지라는 등 떠밀림이 아니라 ”남기고 싶어“라는 어떤 소중한 마음으로 시작해야 비로소 해낼 수 있는 것이 바로 글쓰기에 필요한 자세다.


어제와 그제, 이번 주와 지난주 내내 쓰지 않았음에 대한 부채감보다 오늘을 그저 남기고 싶다는 마음에 더 귀 기울이며 순간에 집중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게 일기의 핵심이다. 그렇게 놓쳐버린 기록에 대한 후회와 무게에 짓눌려 놓쳐버린 오늘이 얼마나 많았던가. 세어보면 내 나이에 절반이 넘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니 실로 아깝지 아니할 수가 없다. 놓쳐버린 시간은 보이지 않게 흐르는 물처럼 손에 잡히지도 않고, 돌이킬 수도 없다. 그러니까 오늘에 최선을 다하자. 오늘이 어제가 되고, 그제가 되고, 지난 주가 된 어느 날 펼쳐볼 수 있도록 오늘로 남겨두자. 설령 펼쳐보지 않더라도 흘려보내지 않았음에 충분하다.


기록이 주는 힘. 그게 분명 있다고 믿는다. 그 기록 속에 담긴 이야기는 문장 너머의 기억까지 새겨준다고 말이다. 내 말이 내 말로써 남을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 지난날의 일기와 글을 보며 새삼 느낀다.


구의 증명, 아니 쓰기의 증명

며칠 전, 최진영 작가님 북토크에 갔었다. 작가님께서는 올해 인생의 두 번째 해외여행을 다녀오셨다고 하는데, 그날 잠들기 전 이 하루를 어떻게든 남겨야 할 것만 같아 무려 한 시간 반동안 일기를 쓰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렇게 기록한 일기는 여행이 끝난 후 지금까지 펼쳐보지 않으셨다고 웃으며 말씀하시곤 언젠가 글이 써지지 않을 때 펼쳐보겠죠 라는 말을 덧붙이셨다.


기록에는 사진보다 더 큰 힘이 있는 것 같다고도 하셨는데, 내가 쓰지 않은 기억까지도 적어둔 그날의 글을 보면 떠오르는 게 참 신기하다고 말씀하셨다. 나도 종종 몇 년 전에 쓴 일기장을 펼쳐보면 하나도 기억나지 않던 날의 기억이 일기 속 몇 문장을 읽음과 동시에 촤라락 무지개처럼 떠오르고 그날의 온도까지 생생하게 느껴졌던 게 떠올라 고개를 마구 끄덕이게 되었다.


일기의 메커니즘

한때는 일기를 참 열심히 쓰기도 했다. 나의 일기 속 특징은 내 마음의 소리보다 현실의 기억에 치중되었다는 것인데, 언젠가 그 문제에 부딪혀 이렇게 일기를 쓰는 게 맞나 하는 고민을 하기도 했다. 그래서 어떤 추상적인 일기를 써보려고 노력도 해봤으나 어쩐지 추상적인 생각과 고민, 답답하고 기쁜 마음을 담는 글쓰기는 매번 같은 말만 반복되는 것 같단 고민을 또다시 안겨주었다.


그래도 뭐라도 쓰는 게 낫겠지라는 마음으로 열심히 쓰다가도 결국 그저 다큐멘터리 카메라로 나를 찍 듯 뭘 먹고 뭘 하고, 어디에 갔는지를 쓰는 그 사건 조사지 같은 일기는 5년 만에 금방 질려버리고 말았다. 그러나 아주 시간이 흐른 뒤 그 일기를 펼쳐본 날 깨달았다. 그 사건 기록지처럼 무미 건조하고, 행동에 기반한 이야기 속에도 내 마음은 깃들어 있었다는 것을.


Just do it-!

그래서 결론은 그냥 쓰라는 말이다. 계속계속 쓰라고. 갖은 핑계를 대면서 자꾸 멈추지 말고 쓰다 보면 결국 그 속에 답이 있다고. 인생은 객관식이 아니라 주관식이고, 그 답은 무수하니까 틀릴 걱정은 할 필요가 없다고 나에게 외친다. 귀차니즘을 달래기 위해 새 노트와 새 펜을 스스로에게 선물했으니 이제 그에 대한 보답으로 너는 글을 써라. 그쯤은 충분히 할 수 있는 거 아닌가?


오늘도 도망치고 싶은 어떤 기록의 두려움 앞에서 나는 노트와 적대 중이다. 그러나 오늘은 이길 것이다. 나의 일기 쓰기에 대한 고충과 마음을 글로 표현하는 두려움에 대한 이야기는 모두 이 글 속에 털어놓았으니 한결 가벼워진 나로서 쓰게 될 것이다. 쓰기 위해 쓰는 삶. 어쩐지 모순적인 것 같지만, 그게 삶이니까.


언젠가 스스로에 대한 의문이 생길 때 펼쳐볼 수 있는 나를 만들어주는 것. 그게 바로 일기라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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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