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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박진서 Mar 16. 2022

악몽으로 기억하는 첫 만남

명탐정 코난의 시작은 고어물이었다

※스포주의※
이 글은 "눈물의 진주목걸이"(제트코스터 살인사건)와 "위기의 인기스타"( 아이돌 밀실 살인사건) 편에 대한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코난에서 가장 잔인한 에피소드를 뽑으라고 하면, "눈물의 진주목걸이"를 많이들 언급한다. '이게 소년만화에 실리는 만화인가' 싶을 만큼, 상상 이상으로 잔인하고 적나라하다. 유혈이 낭자하고 시체도 훼손되는, 추리보다 고어물에 가깝다고 느껴지는 사건이다. 추리만화인 만큼 잔인한 사건이 있다고 이상할 건 없다. 잔인함의 정도만 보더라도 미국의 고어 만화나 코난과 김전일 시리즈를 놓고 비교해보면, 정말 귀여운 수준이다. 하지만 코난의 이 잔인한 사건이 특별히 깊은 인상을 남기는 이유가 있다. 이게 바로 첫 번째 에피소드라는 점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랬겠지만, 나 또한 이 에피소드로 코난을 처음 만났다. 처음 이 에피소드를 보았을 때의 그 생생한 공포가 여전히 기억난다. 초등학생이었던 나는 살면서 단 한 번도 공포물을 본 적이 없었다. 원체 겁이 많은 편이기도 했고, 주변에도 그런 장르를 좋아하는 친구나 가족이 없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그런 나에게 이 에피소드는 너무나 큰 충격이었다. 깊은 숙면으로 꿈을 잘 꾸지 않는 내게 악몽을 선사할 만큼.


    "눈물의 진주목걸이"는 롤러코스터에서 벌어지는 살인 사건이다. 놀이공원에 간 미란과 (아직 어려지지 않은) 남도일은 롤러코스터에 탑승한다. 그리고 롤러코스터가 터널에 진입할 때, 남도일은 얼굴에 떨어지는 알 수 없는 액체의 감촉을 느낀다. 의아함을 느끼던 찰나, 터널을 빠져나오자 그 액체의 정체가 밝혀진다. 앞에 타고 있던 남자의 피였다. 심지어 피해자는 목이 절단되어 피가 분수처럼 쏟아지고 있었다. 하지만 중간에 멈출 수가 없었던 롤러코스터는 결국 끝까지 돌아왔고, 그곳에서 남도일은 추리를 시작한다.

    사건의 범인은 같은 열차에 타고 있던 피해자의 전 애인으로 밝혀진다. 사실 트릭 자체는 현실성이 거의 제로에 수렴한다. 터널에 들어갔을 때 진주목걸이를 활용해 피아노줄을 피해자의 목에 걸면 롤러코스터의 가속도가 줄을 잡아당겨 남자의 목을 자른다는 것인데, 물리적으로야 말이 되겠지만 안전바를 벗고 뛰어올라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게 말이나 되겠는가. 아마 안전바를 뿌리치는 순간 가속도 때문에 사람이 날아가버릴 확률이 훨씬 높을 것이다. 범인이 체조선수였다는 설정을 높여보려 시도하지만 , 정말 허무맹랑한 이야기다.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건, 이 에피소드를 애니메이션이 아닌 만화책으로 접했다는 점이다. 아마 애니메이션으로 봤다면 아마 코난을 다시는 보지 않았을지 모른다. 피범벅이 되어버린 이 사건을 올컬러의 움직이는 영상으로 만났다면 어린 나이에 트라우마 같은 기억이 되었을 테니까. 사실 영상으로 볼 자신이 없어서 지금까지도 애니메이션을 시도조차 않은 회차이기도 하다.

   흑백의 정지된 이미지로 만난 사건은 악몽을 선사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계속해서 읽고 싶다는 호기심을 이끌어내기도 했다. 그런 자극적인 컨텐츠의 세계를 처음 만났던 탓인지, 꿈속에 계속해서 등장하는 그 이미지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비록 악몽의 형태였지만 나름 입덕의 한 과정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리고 왠지 무섭지만 계속해서 다음 장을 넘기게 되는, 스릴러의 매력을 알게 된 것 같다. 공포영화를 무서워하는 사람들도 눈과 귀를 가린 채 손가락 틈새로 영화를 훔쳐보게 만드는 그런 매력을 말이다. 이렇게 코난과의 첫 만남은 나를 추/미/스 덕후의 세계로 이끌었다.

    명탐정 코난의 1권이 무섭게 기억되는 이유가 또 하나 있는데 그건 바로 "위기의 인기스타" 편 때문이다. 앞서 언급한 "눈물의 진주목걸이"의 강렬함에 묻혀 자주 언급되진 않지만 이것도 정말 예사롭지 않다. 어느 날 인기 아이돌의 집에서 시신이 발견된다. 흉기가 시신의 복부를 완전히 관통한, 누가 봐도 타살로 보이는 사건이었다. 하지만 타살로 위장한 자살이었음이 밝혀진다. 얼음에 칼을 꽂은 후 그 칼에 자신의 몸을 던져 자살하고, 얼음이 녹은 후에 현장이 발견되도록 했던 것이다. 자신의 시체를 훼손하는 자살의 방식, 특히나 스스로의 배에 칼을 꽂는 할복의 방식을 택했다는 점은 전형적인 고어물의 모습과 닮아 있다.


    생각해보면, 이런 잔혹한 에피소드들로 독자들에게 첫인상을 심어준다는 것은 굉장한 자신감의 표출이다. 물론, 모든 콘텐츠는 처음에 독자들을 끌어들이는 것이 매우 중요하고 이러한 후킹(hooking)을 위해 창작자들은 자극적인 내용으로 관심을 끌어모은다. 하지만 이것이 효과적인 건 단기적인 문제다. 이후에 지속적으로 독자들이 함께 갈 수 있도록 하는 지구력을 만드는 것은 한두 번의 자극적인 내용이 아니기 때문이다. 30년에 가까운 장기 연재를 모두 자극적인 내용으로 풀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자극적인 사건으로만 가득 채우면, 조금이라도 그 자극이 떨어지는 순간 독자들은 나가떨어지고 결국엔 자극적인 것만 찾다 방향성을 잃는다.

    무려 '소년' 만화인데도 그야말로 '마라맛' 그 자체인 이런 서사를 채택하는 것은 적지 않은 리스크였을 거이다. 하지만 그것이 이후 코난 시리즈가 얻게 될 엄청난 흥행의 시초석이 되었음은 확실하다. 아마 나 같이 공포와 호기심을 동시에 느꼈던 어린 독자들의 숨겨진 욕구를 자극한 것 아닐까 싶다. 무섭지만 다음 이야기가 궁금해지고, 공포감을 뚫고 계속 읽으면 왠지 겁쟁이였던 내가 어른이 된 것 같은 환상을 심어준다. 그런 매력을 아주 잘 보여주는 것이 명탐정 코난의 첫 에피소드다.


    "눈물의 진주목걸이" 편은 가장 오래된 이야기지만, 여전히 마니아들에게 강력하게 기억되는 에피소드다. 그만큼 작품의 '처음'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상기시켜준다. 30년 가까이 연재했어도, 결국 독자들이 가장 많이 기억하는 것은 그 작품의 첫인상이다. 3초 만에 결정된 사람의 첫인상이 이후의 모든 관계를 결정한다는 말이 있듯, 컨텐츠 또한 마찬가지다. 일단 컨텐츠에 유입이 되어야 그 사람들을 계속해서 끌고 가든 말든 할 것 아니겠는가. 자극적이지만 작품의 결에서 벗어나지 않으면서, 그 자극으로 인해 이후 작품에 마이너스가 되지 않을 만한 그런 오프닝을 찾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그리고 아오야마 고소는 이것을 가능케 하는 능력을 가졌다. 그가 20년도 넘게 연재될 시리즈를 만들어 갈 역량을 가졌다는 점은 이미 첫 화에서부터 나타난 게 아닐까 싶다.

    시간이 지나면서 코난 시리즈에 대한 독자들의 애정도 점차 식어간다. 오랜 기간 연재된 컨텐츠들이 모두 겪는 수순이다. 소재가 떨어지면서 사건의 치밀함이나 재미도 예전 같지 않고, 나 또한 어렸을 때만큼 열심히 코난을 보지 않는다. 하지만 그럼에도 코난이 지금처럼 스테디한 마니아층을 확보할 수 있는 건 '처음' 때문이다. 그 강렬한 첫 만남을 잊지 못하는 독자들은 코난을 욕하면서도 미운 정, 고운 정을 다 주며 오늘도 코난을 본다.

    세상의 모든 작가들은 첫 사건, 첫 단락, 첫 페이지, 그리고 첫 문장에 사력을 다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중 한 명인 정유정 작가는 모든 작품을 다 쓰고 난 후에야 첫 문장을 쓴다고 한다. 작품의 모든 서사와 분위기, 주제를 한 번에 압축할 수 있는 하나의 문장을 찾기 위함이다. 이쯤 되면 나 스스로를 반성하게 된다.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는 거장들도 자신의 처음을 위해 치열하게 고민하는데, 나는 과연 누군가에게 보일 '처음'을 위해 얼마나 노력하고 있었던가. 다른 사람들은 '처음' 만나는 나를 어떻게 기억해줄까. 그리고 더 나아질 '처음'의 느낌을 위해 오늘도 나는 내 글의 첫 문장과 첫 단락을 다듬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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