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을 모르는 사람도 코난의 이 대사는 알지 않을까? 거의 매 화마다 코난이 하는 이 말은 하나의 유행어이자 밈으로 자리잡았다. "내 이름은 X난, XX이죠"라는 다양한 형태의 패러디와 함께 각종 커뮤니티와 SNS를 가득채우고 있다. 명탐정 코난 시리즈어 관심이 없는 사람들마저 사로잡은 바로 이 유행어의 힘은 대체 어디서 온 걸까?
사실 이 문장은 그저 자기소개일 뿐이다. 얻을 수 있는 정보도 두 가지 뿐이다. (1) 그의 이름이 코난이며 (2) 그가 탐정이라는 것. 게다가 이 자기소개는 <명탐정 코난>이라는 제목을 그저 하나의 문장으로 늘린 것일 뿐 추가적인 정보를 제시하지도 않는다. 굳이 차이를 꼽자면 제목에서는 탐정 앞에 '명(名)'자가 붙어 코난의 추리력을 암시한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것을 반대로 생각해보면, 오히려 단순한 문장이 <명탐정 코난>이라는 길고 장황한 시리즈의 모든 것을 담아내는 로그라인(log-line)의 역할을 한다. 로그라인이란, 영화처럼 스토리가 있는 창작물에서 본격적인 창작을 하기에 앞서 작품의 전반적인 컨셉과 주인공, 배경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 것을 말한다. 로그라인은 한 문장이라는 짧은 길이에 작품의 정체성을 담아내며, 이 한 문장을 토대로 시놉시스와 줄거리, 나아가 완성작으로까지 뻗어나가는 작품의 뿌리 역할을 한다. 뿐만 아니라, 처음부터 긴 스토리텔링을 이어가기 어려운 창작자에게 이야기의 전반적인 방향성과 목적지를 제시하는 나침반의 역할을 하기도 한다. 뿌리이자 나침반이라는 비유처럼 이야기를 만드는 데 있아 아주 귀중한 존재라 할 수 있겠다. 우리가 시중에서 볼 수 있는 대부분의 스토리텔링 창작서들도 로그라인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또 강조한다. 지도 없이 모험을 떠날 수 없듯, 로그라인 없이 스토리를 만들 수 없다고 말이다.
물론, "내 이름은 코난, 탐정이죠."라는 문장은 로그라인이 되기에는 다소 부족한 면이 있다. 코난이 처한 상황이나 배경에 대한 설명도 없고, 앞으로 그가 어떤 행동을 통해 이야기를 펼쳐나갈 것인지에 대한 암시도 부족하다. 굳이 이 문장을 발전시켜 로그라인으로 만들어보자면 이 정도가 되지 않을까 싶다.
고등학생 탐정에서 어린이가 된 코난이 사건을 해결하며 자신을 작아지게 만든 검은조직의 진실에 다가가는 이야기.
이렇게 정리하는 것이 훨씬 풍부한 정보를 전달할 수 있다. 아오야마 고소도 아마 처음에 스토리 컨셉을 잡을 때 이런 식으로 자신의 이야기를 설정했을 것이다. 시리즈가 한없이 길어짐에 따라 캐릭터들의 설정이 붕괴하고, 떡밥이 회수되지 못하며, 앞뒤가 맞지 않는 옥의 티가 발견되는 경우도 있지만, 로그라인에 담긴 저 문장 속 이야기가 바뀐 적은 단 한번도 없다. 코난은 여전히 어린이의 몸을 가진 고등학생 탐정 남도일이며, 검은조직의 음모에 다가가기 위해 고군분투하며 사건을 풀어가는 중이다. 디테일은 달라졌지만 뿌리는 굳건히 이야기의 중심을 지키고 있다.
코난에 대한 인기는 여전하고, 당초에 세웠던 연재 종료계획은 조금씩 미뤄지고 있다. 연재가 길어지면서 작품에 대한 독자와 대중들의 사랑도 조금씩 식어간다. 점점 유치해진다거나, 추리물이 아니라 첩보-코믹-청춘로맨스처럼 변해가고 있다거나, 추리소설로서의 트릭이나 사건 설정들이 예전같지 않다는 평이 심심치 않게 들려오고 나 또한 그렇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탐정 코난> 시리즈는 예전히 적지 않은 팬들의 사랑을 받으며 꾸준히 연재를 이어가고 있다. 아마도 그 긴 시간을 나아갈 수 있게 해주는 지구력과 원동력은 이야기의 정체성을 단단히 지키고 있는 로그라인에서 비롯된 것이리라.
로그라인은 창작자들에게만 도움을 주는 것은 아니다. 관객의 입장에서 어떤 콘텐츠를 볼지 말지 결정할 때에도 그 작품의 로그라인은 주요한 기준이 된다. 영화사이트나 OTT서비스에 접속해 정보를 탐색하거나, 영화제에서 프로그램 소개를 읽어보며 작품을 선택할 때, 줄거리와 시놉시스는 굉장히 중요하다. 콘텐츠를 보는 데에 짧지 않은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만큼, 그 시간을 소중히 여기는 관객들은 헛되지 않은 선택을 위해 줄거리를 보며 신중을 가한다. 특히나, 컨텐츠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요즘에는 시놉시스마저 길게 느껴진다. 더 짧고 간결해 시간을 절약할 수 있으면서도 더 정확하고 안전한 정보를 원한다. 이런 관객들에게도 로그라인이 아주 중대한 역할을 한다. 아주 짧지만 그 작품의 뿌리이자 정수를 담아낸 문장 속에서 관객들은 자신의 선택을 만들어간다.
뿐만 아니라, 관객 스스로가 로그라인을 직접 만들어가기도 한다. 어떤 작품을 보고난 후, "그 영화 좋았어"라거나 "그 책 재밌더라"라는 식으로 주변에 이야기를 하면 보통 이런 반응이 따라온다. "어떤 얘긴데?" 그러면 우린 머릿속에 남아있는 이야기의 조각조각을 끌어모아 짧게 요약한다. 때로는 내가 재미있게 본 작품의 모든 것을 전해주고 싶은 나머지 이런저런 군더더기를 붙여가며 최대한 생생하게 전하고자 하지만, 그걸 듣는 상대방은 이렇게 말할 것이다. "그래서, 요점이 뭔데?" 그럼 우린 한 문장으로 답한다. "어, 주인공이 어쩌구저쩌구해서, 누구누구랑 맞서가지고 이러이렇게 되는 얘기야." 그렇다.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로그라인을 만들고 있는 셈이다.
이러한 과정들을 거쳐 대중들에게 영화는 작품 그 자체나 이야기 전체보다 결국 로그라인으로 기억된다. 관객 한 사람 한 사람의 입장에서는 영화 속의 어떤 디테일이나 캐릭터, 자신만의 웃음포인트 등이 인상깊을 수도 있겠지만, 대중 전반의 관점으로 보자면 남는 건 결국 로그라인이다. 작품의 탄생을 이끈 것도, 관계자들이 그 작품을 홍보하는 것도, 관객들이 그 작품을 선택하는 것도, 그 작품을 다른 이에게 전파하는 것도 모두 로그라인을 통해 이루어지니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무엇보다 콘텐츠의 경쟁상대와 선택지가 끝도 없이 늘어나는 오늘날의 시장 속에서, 최소의 분량으로 최대 기억을 이끌어내고 싶은 인간의 인지적 특성을 고려하자면 더더욱 그렇다. 로그라인이 중요하다 말하는 수많은 작법서들이 말하고자 하는 요지도 결국 이러한 맥락일 것이다.
다시 앞으로 돌아가보자. 코난이라는 작품 그 자체보다 "내 이름은 코난, 탐정이죠"라는 로그라인 비스무리한 이 문장이 더 많은 대중들에게 기억되는 것도 이러한 방식으로 설명할 수 있다. 코난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래서, 코난이 무슨 얘긴데?"라고 묻는다면 대부분의 팬이나 독자들은 구구절절하게 줄거리를 덧붙여 설명하기 시작할 것이다. 주인공(코난)이 어떤 상황에 처해있으며(어린이가 됨), 장애물은 무엇이고(검은조직), 어떤 행동을 펼칠 것인가(사건을 해결)를 모두 설명하고 있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설명에 대한 열정이 불타오르면 여기에 살을 붙여 갖가지 세계관에 대한 설명이나 전사들, 인물 간의 관계까지 설명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그다지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 많은 정보는 오히려 독이 될 뿐이다. 그들의 뇌리에 남는 정보는 "내 이름은 코난, 탐정이죠"라는 시리즈의 대명제뿐이다. 그런 점에서 이 문장은 포용력이 높은 편이다. 코난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와 상관없이, 누구든 단번에 이해시키고 납득할 수 있는 문장이니 말이다. 또, 이런 포용력 덕에 코난 덕후들은 "코난이 누구냐면..."이라고 하면서 다른 사람들에게 설명해야 하는 수고를 덜 수 있다.
게다가, 작품 속에서 셀 수 없을 만큼 자주 반복되는 이 문장은 세뇌 효과를 불러일으키는 것 같기도 하다. 에피소드별로 새로운 용의자와 범인, 피해자가 등장하는 시리즈의 특성 상 코난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설명해야 하는 경우가 꽤 빈번하다. 극장판에서는 혹시나 코난에 대해 모르고 있을 관객들을 위해 캐릭터와 세계관에 대한 설명을 친절하게 덧붙인다. 그것도 각 버전마다 전혀 다른 방식으로 하는 수고를 감수하면서. 이때마다 등장하는 "내 이름은 코난, 탐정이죠"라는 문장을, 사람들은 잊을래야 잊을 수 없다.
이 문장은 작품의 결정적인 순간에 등장하는 자신감 충만한 멘트이기도 하다. 권선징악의 프레임을 가져가기에 코난 속 99% 이상의 사건들은 범인이 검거되며 해결된다. 많은 범인들이 순순히 체포에 응하지만, 완전범죄를 꿈꿨던 범인이 코난에 의해 범행이 발각되면 분한 마음에 행패를 부리기도 하고 자신이 졌다는 생각에 "넌 대체 누구냐?"고 묻는다. 그럴 때마다 코난은 말한다. "내 이름은 코난, 탐정이죠." 클라이막스마다 작가가 이 대사를 넣어주시는데 기억을 안 할 수가 있겠는가. 이 정도면 작가도 이 문장이 유행어가 될 거란 걸 예상한 것이 분명하다고 본다.
아무리 긴 콘텐츠라 할지라도 결국 그 콘텐츠를 기억하는 방식은 작가가 만들어낸 뿌리이자 정체성인 로그라인이라는 점이 참 흥미롭다. 작품의 시작과 작품에 대한 기억들이 맞닿아있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콘텐츠 소비자인 우리는 자신도 수동적으로 이야기를 받아들인다고만 생각했겠지만, 우리도 모르는 새에 로그라인이라는, 이야기의 본질에 점점 다가가고 있었던 셈이다. 어떤 콘텐츠가 로그라인의 형태로 관객의 머릿속에 기억되는 순간, 창작자와 관객의 마음은 이미 하나로 융화가 된 것이 아닐까.
뿐만 아니라, 콘텐츠가 가진 세뇌효과는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코난을 본 사람이면 다른 대사는 몰라도 "내 이름은 코난, 탐정이죠"라는 그 문장 하나 만큼은 잊지 못하게 하는 힘과 어떻게든 머릿속에 코난의 대명제를 각인시키겠다는 집념, 그리고 그 문장들을 독자가 아닌 사람들에게마저 익숙하게 만들어내는 방법들은 창작자가 관객들에게 콘텐츠를 기억하게 만드는 방법을 생각해보게 한다.
난 이러한 자세를 직접 실천해보았다. 다름 아닌 이 글에서. 길지 않은 글 속에서 빈번히 등장하는 "내 이름은 코난, 탐정이죠"라는 문장들이 당신의 기억 속에 가 닿기를 조심스레 기원해본다. 아마 이 단락을 보는 순간 당신은 그 문장과 명탐정 코난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 임팩트를 위해 한 번 더 반복해본다. "내 이름은 코난, 탐정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