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말

[오늘도, 사람!]

by 별체



인어공주가 자신의 죽음으로 희생하고, 로미오와 줄리엣이 사랑을 이루기 위해 죽음을 택하고, 조폭이었던 남자가 사랑 때문에 조직을 나가려다가 죽을 만큼 맞고, 여자를 얻기 위해 두 남자가 총 싸움까지 하면서 다 죽는 드라마를 유심히 보면서 청소년기의 나는 사랑에 대한 정의를 내렸다.


사랑이란 건 죽음을 마다하지 않는 거구나!


사랑만 하면 다 죽어나가는 게 그땐 이상하지도 않았다. 드라마 속 주인공이 죽을 만큼 사랑한다며 상대를 붙잡을 때마다 결국 다시 이어지는 걸 보면서 마냥 설레기만 했다.


누군가를 위한 애정이 죽음보다 더할 수 있다는 사실이 근사했지만, 한편으로는 이런 게 사랑이라면 나는 살면서 사랑하기 쉽지 않겠다고 느꼈다.


그래서인지 성인이 된 후 연애를 할 때마다 진짜 사랑이 맞는지 자주 의심했다. 대부분의 연애가 무난했기 때문이다.


드라마에서 보던 극적인 장면들은 현실에 없었다. 내 애인 중에는 죽음을 앞둔 암 환자도, 조폭인 사람도 없었고, 죽을 만큼 사랑한다고 외쳐주는 철부지 부잣집 도련님도 없었다.


나 역시도 상대에게 죽음을 각오한 사랑을 건넬 순 없었다. 죽음까지는 어려워도 애인 어머니한테 뺨 정도는 맞겠다고 각오했지만, 내게 무례했던 분은 한 분도 없었고 애초에 뺨맞는 일 자체가 현실에서는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죽음과는 전혀 관계없는 연락 주기, 만나는 횟수, 대화의 성실도, 선물을 주고받는 횟수 같은 것들로 사랑을 가늠해 볼 뿐이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는 죽음을 불사하는 사랑에 대한 미련을 남겨두었다.


20대 초중반, 2년을 만난 제이와 마지막으로 싸웠던 게 헤어지기 두 달 전이었다. 크게 싸운 그날을 기점으로 우리는 대화 자체를 하지 않으려 했다.


매일 만나던 만남을 일주일에 한 번으로 줄이고, 데이트에 나와도 각자 핸드폰만 봤다. 수시로 하던 연락도 의무적인 보고 이외에는 하지 않았다. 둘 중 누가 먼저 헤어지자고 말할지 눈치 싸움을 하는 중이었을 뿐, 이미 헤어진 것과 다름없었다.


결국 확실히 정리하기 위해 내가 먼저 이별의 말을 꺼냈다.


“싫어. 난 아직 죽을 만큼 너 사랑해. 헤어지면 나 죽을 거야. 나 죽으면 너 때문이야.”


만나면서 늘 점잖기만 하던 제이의 입에선 생각지도 못한 말이 흘러나왔다. 그건 내가 한번쯤 들어보고 싶던 말이기도 했다.


문제는 내가 상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는 것이다. 드라마에서 볼 땐 마냥 로맨틱하던 그 말을 현실로 마주하자 덜컥 겁이 났다.


평소에 실없는 말은 하지 않았던 제이가 정말 죽을까봐 걱정이 됐다. 정말 사랑하는 거 맞는지, 그럼 최근에 왜 그랬는지를 물었지만 제이는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았다.


우리의 사랑이 끝났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혹시나 하는 생각 때문에 이별을 강행할 수 없던 나는 헤어지자는 말을 취소했다.


그렇게 집에 돌아온 그날 밤, 여전히 제이에게서는 잘 들어갔는지 혹은 뭐하는지 묻는 연락은 오지 않았다. 나도 굳이 연락하지 않았다.


다만 그가 꺼낸 말, ‘죽을 만큼 사랑해’가 자꾸 머릿속을 맴돌았다. 죽음과 사랑이라는 단어 사이에서 ‘사랑’에 더 초점을 두며 마냥 달콤하게만 상상했던 그 말이, ‘죽음’에 초점을 맞추자 단번에 협박으로 바뀌었다.


애초에 오해를 불러일으킬 여지가 높았던 그 표현을 나는 너무도 단순하게만 생각했던 것이다.


어찌 보면 죽을 만큼 사랑한다는 건 죽음을 통해서만 증명될 수 있는 사랑 같기도 했다. 결국 증명되기 전까지는 계속 의심하고 의심받는 것. 만약 증명된다 해도 아무 소용이 없겠지. 그건 이미 죽어버렸단 뜻일 테니까.


그럼 결국 죽음과도 같은 사랑이란 없는 거구나. 앞으로는 죽음과 사랑이란 단어를 동시에 놓지 말아야겠다. 여기까지 생각했을 때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제이의 카톡이었다.


[낮에 그렇게 말해서 미안해. 죽겠다는 말 거짓말이야. 갑자기 헤어지면 외로울 것 같아서 안 헤어지려고 그랬어. 네 말대로 헤어지자.]


따로 답장은 하지 않았다. 그저 제이가 앞으로 만날 누군가에게는 자신의 죽음으로 협박하며 이별을 유예하지 않길, 내가 앞으로 만날 누군가에게는 죽음에 가까운 행위로 사랑을 증명해보라고 다그치지 않길 바라며. 그렇게 제이와 나는 별 탈 없이 모르는 사람으로 돌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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