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을 가르쳐준 사람들(3)
[오늘도, 사람!]
초등학교 3학년 때 반 애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 고백을 받았다. 내게 고백을 했던 형이는 성장이 빨라 또래들보다 한 뼘 이상으로 키도 크고, 이른 변성기 덕분에 쉰 목소리가 났다.
다르다는 것을 틀린 것으로 받아들이던 그 나이의 친구들은 놀이를 포함한 다양한 활동에서 형이를 소외시키는 경향이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형이를 거리낌 없이 내 무리에 끼워서 함께 놀곤 했다. 형이가 불쌍하다거나, 친구들이 잘못됐다거나 하는 마음으로 그랬던 건 아니었다. 그저 내가 여자 반장인 우리 반에서 누군가 소외되는 것이 보기 싫었을 뿐이었다.
어느 날, 형이가 수업이 끝난 후 학교 뒤뜰로 나를 불렀다. 가보니 우리 반 애들의 대부분이 함께 몰려 있었고, 형이가 그 가운데에서 부끄러운 듯이 서 있었다.
내가 온 것을 본 친구들은 소리를 지르기 시작했고, 형이는 자신이 직접 쓴 손 편지를 내밀며 나를 좋아한다고 고백했다. 편지를 지금 열어봐도 되냐고 물었더니 집에 가서 혼자 보라고 했다. 그러면서 고백의 답변은 지금 이 자리에서 해달라고 했다.
편지 내용도 못 본 채 답변을 하라고 하니 당황스러웠지만, 내용을 봐도 어차피 달라질 건 없었다. 나는 그때까지 형이를 이성적으로 좋아해 본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그럴 예정이었다. 명확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공개적으로 거절하는 것이 부담스러워 형이만 따로 불러 뒤뜰 더 깊숙한 곳으로 들어갔다.
“네 맘을 받아줄 수 없어. 널 좋아하지 않아. 미안해.”
“왜?”
“넌 반장이 아니잖아.”
형이는 황당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봤다. 학창 시절 내내 반장을 해왔던 나는 웃기게도 반장이라는 높은 프라이드가 있었다.
내가 만나야 할 사람들도 당연히 반장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그러하듯, 좋아하는 사람도 반듯반듯한 모범생 스타일이었다. 사회적 지위라는 단어가 뭔지도 모를 때부터 나는 이미 권력과 명예가 있는 사람이 좋았다.
초등학생이 생각하기에 주변에 그런 걸 가진 사람은 반장이었다.
편견 없이 자신과 놀던 내가 편견 덩어리라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형이는 내 손에 쥐어진 편지를 다급히 뺏어서 쫙쫙 찢어버렸다. 그러고는 저만치 뛰어가서 나와 거리를 둔 뒤 크게 외쳤다.
“누가 너 같은 거 진짜 좋아한대? 이 저글링 같은 게!”
저글링은 당시 유행하던 전략 게임, 스타크래프트에 나오는 조그맣고 못생긴 괴물이었다. 그때는 내가 그 게임을 몰랐기 때문에 무슨 뜻인지 몰라서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날부터 학교에서 내 별명은 저글링이 됐다.
자신의 고백을 거절한 게 잔뜩 약이 올랐는지 그날부터 형이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됐다. 마주칠 때마다 저글링이라고 놀리는 것은 물론, 지나가면서 일부러 툭툭 치기도 했다.
짝이 되었을 때는 책상 한가운데에 선을 긋고 실수로 넘어갈 때마다 연필로 내 손을 찍는 시늉도 했다. 그때마다 나도 형이를 때리거나 소리를 질렀다. 그러면 형이는 자기를 때리는 모습이 저글링이랑 똑같다고 더 신나서 나를 약 올렸다.
도대체 저글링이 뭔가 싶어서, 다니던 컴퓨터 학원 선생님에게 게임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같이 학원을 다니던 동갑내기 친구들은 나 빼고 전부 남자애들 밖에 없었다. 수업이 끝나면 바로 집에 돌아가던 나와 달리, 친구들은 선생님의 허락을 받고 스타크래프트를 30분 정도 하다가 집에 돌아가곤 했다.
이미 실력이 좋아진 남자애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나를 게임에 껴주지 않았고, 내가 부탁할 사람은 선생님뿐이었다.
선생님은 가르치는 초등학생 중 유일한 여자애였던 나를 무척이나 귀여워하셨다. 학원 끝나고 집에 돌아갈 때, 종종 엄마한테 전화해서 저녁먹이고 들여보내도 되는지 묻고 햄버거를 사주시거나, 내가 수업 내용을 이해 못해서 멍하게 앉아있으면 수업이 끝났는데도 다시 차근차근 쉽게 설명해주셨다.
나도 친절한 선생님이 좋아서 학원 수업 시간보다 일찍 가서 교무실 선생님 옆에 자주 앉아 있었다. 나를 예뻐하면서도, 나에 대해 모든 걸 얘기해 주는 선생님을 엄마도 무척이나 신뢰하고 좋아했다.
선생님은 엄마한테 전화해서 내가 게임을 배우고 싶어한다고 알렸고, 엄마는 크게 한숨 쉬며 가르쳐주라고 하셨다. 관심 가진 것들은 전부 해야만 직성에 풀리는 욕심쟁이 딸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하고 싶은 종족이 있어?”
“종족이 뭐예요?”
“음... 여기 봐봐. 이 세 개 중에서 마음에 드는 거 골라봐.”
선생님은 괴물 2마리와 기계 1개가 서 있는 화면을 보여주며 골라보라고 했다. 세 개 다 이상하고 별로였다.
“선생님, 저글링 알아요?”
“알지. 저그를 선택하면 저글링을 데리고 게임할 수 있어.”
선생님은 가운데에 서 있는 울긋불긋한 용처럼 생긴 징그러운 괴물을 가리키며 말했다. 셋 다 별로였지만 제일 이상한 종족에 있는 유닛을 내 별명으로 붙인 형이를 당장이라도 한 대 더 때리고 싶어 몸이 근질근질했다.
만화 세일러문과 웨딩피치를 통해 눈 크고 팔다리 늘씬한 2D 캐릭터만 보다가 이런 이상하게 생긴 애들 중 하나를 골라 몰입해서 플레이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짜증 났다. 괴물이 들숨날숨을 내쉬며 서 있는 모습을 본 나는 종족 선택을 망설였고, 선생님은 내가 스스로 선택할 때까지 인내심 있게 기다렸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