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주의의 역설(1)

[오늘도, 사람!]

by 별체



“간디는 아무래도 자기가 폭력적인 걸 숨기려고 비폭력주의를 주장한 것 같아.”


가을에 내리는 비 치고는 거센 기세로 내리는 비바람을 뚫고 제이의 자취방에 도착했다. 교양수업이 있는 나와는 다르게 공강이었던 제이는 청소를 하다가 나를 맞이했다. 비바람으로 엉망이 되어버린 나의 몰골과 퀭한 두 눈을 본 제이는 수건과 자신의 헐렁한 옷들을 건네며 알만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또 인도 때문에 망했어?”

“어.”


나는 퉁명스러운 대답과 함께 옷을 훌훌 벗어 젖은 몸을 수건으로 툭툭 닦고는, 제이가 건넨 티셔츠와 추리닝 바지를 입었다. 제이는 내가 갈아입은 옷들과 수건을 집어 들고는 바로 세탁기에 넣어 빨래를 돌렸다.


“나중에 내가 빨아도 되는데. 오늘 어차피 금요일이잖아. 날씨가 이래서 잘 마르지도 않을 것 같아.”

“주말 내내 비 온대. 빨래해서 따끈한 바닥에 널어놓으면 금방 말라.”


그 말을 들은 나는 방바닥에 털썩 앉았다. 제이가 미리 틀어놓은 보일러 덕분에 엉덩이에 따뜻한 기운이 금세 올라왔다. 그 상태로 벽에 기댄 나는 흐물흐물해지는 기분으로 상 위에 놓인 제이의 노트북 화면을 쳐다봤다. 방바닥에 앉은 나의 눈높이보다도 더 낮은 위치에 놓인 노트북이었다.


좌식생활이 편하다는 제이의 자취방에는 책상, 의자, 소파, 침대 등이 아예 없었다. 방바닥에 앉는 좌식생활이 불편했던 나는 제이에게 책상이라도 사는 게 어떻겠냐고 권유했지만, 제이는 어차피 집에서는 공부를 하지 않기 때문에 필요 없다고 했다. 그러고는 꿋꿋하게 작은 밥상 위에 노트북을 두며 생활했다.


“눈이 때꾼하다.”


어느새 방울토마토를 씻어 내 옆에 놔둔 제이는 내 가방을 열어 내가 챙겨온 노트북을 꺼내 자신의 노트북 옆에 두고 전원을 켰다. 전날 밤을 새운 뒤 수업을 듣고, 비바람까지 뚫고 오느라 몹시 피곤해진 나는 대충 끄덕였다. 말을 거는 제이가 없었다면 금방이라도 드러누울 기세였다.


“어제 잠 안 잤어?”

“응. 승리를 위해 멈출 수 없었어.”

“그런데도 이기진 못했고?”

“말했잖아. 간디 때문이야. 비폭력주의자는 개뿔. 핵 날리고 뒤통수치는 폭력주의자더라.”


내 말을 들은 제이는 킥킥거렸다. 최근 나와 제이를 비롯한 학과 동기들은 문명5라는 전략 게임에 푹 빠져 있었다. 덕분에 나는 지난밤에도 잠을 자지 않고 게임을 했다. 금요일 오전에 하나 있는 교양수업만 들으면 주말이니 밤을 새워도 괜찮겠다는 계산을 끝냈기 때문이다.


문명5는 하나의 나라를 건국하고 발전시켜서 다른 모든 나라를 이기면 끝나는 게임이다. 기원전부터 현대까지 약 6-7000년이 넘는 시간을 플레이해야 하기 때문에, 실제 플레이 시간도 하루를 꼬박 투자해야 겨우 한 판이 끝났다.


나의 첫 번째 도전은 순수 플레이 시간만 총 21시간이 걸렸고, 두 번째 도전에서도 20시간이 걸렸다. 실제로는 주중에 다른 일상을 병행해야 했기에, 한 판당 3-4일씩 걸렸다. 문제는 이렇게 시간을 쏟아부은 게임 두 판 모두, 나는 간디 때문에 졌다.


이 게임에서 이길 수 있는 방법은 네 가지나 있다. 전쟁을 일으켜 모든 나라의 수도를 함락시키거나, 가장 빨리 우주선을 만들어 달나라로 보내거나, 뛰어난 외교를 선보여 세계지도자로 선출되거나, 온갖 문화유적지를 건설해서 가장 유명한 나라가 되면 이길 수 있다.


나는 전쟁을 일으키는 정복승리는 질색을 했는데 전쟁을 좋아하지도 않을뿐더러, 전투유닛을 뽑아 공격하려는 곳까지 이동시키고, 전멸 당하면 새로 뽑아서 다시 보내는 등 유닛 하나하나 일일이 행동을 지시해야 하는 게 무척 번거로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로 우주선을 만들어 달나라로 보내는 과학승리나, 문화유적지를 건설하는 문화승리를 노렸다.


그렇다고 해서 다른 부분을 소홀히 해도 되는 건 아니었다. 이길 수 있는 조건은 나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 AI인 다른 나라들도 해당되기 때문이다.


내가 전투에 특화된 건물이나 유닛 만드는 걸 소홀히 하면 전쟁으로 이기길 원하는 나라에서 바로 쳐들어왔다. 전투력을 보강하다 보면, 내가 만들어야 할 유적지를 다른 나라에서 먼저 만들기도 하고, 유적지를 짓는데 심혈을 기울이다 보면, 다른 나라에서 먼저 과학적인 발명을 이루어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중심을 잘 잡고, 순간순간 선택을 잘 해나가는 게 중요했다.


군사력 보강에 취약했던 나는 자꾸 원치 않는 전쟁에 휘말려야 했는데, 그중 가장 기분 나쁘게 시비를 걸어오는 게 인도의 간디였다.


“나한테 코코아를 줄 테니 다이아몬드를 내놓으라고 하더라. 사기꾼 같은 자식. 그게 말이야, 방귀야. 거기에 세종대왕이 통치하는 한국에 코코아가 왜 필요해? 됐다고 했더니 바로 전쟁 선포하더라. 왜 인도에서 핵을 쏘고 난리야.”


간디는 문명5에서 가장 유명한 캐릭터였는데, ‘순순히 금을 넘긴다면 유혈사태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라는 말 덕분이었다. 이 게임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도 이 말과 게임 장면을 알 정도로 유명했다. 제이와 내가 이 게임을 시작했던 이유도 게임 내의 어떤 상황에서 간디가 이런 말을 하는지 궁금해서였다.


게임 내에서의 간디는 비폭력 저항과는 아주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툭하면 시비를 걸었고, 다른 나라와의 사이에서 이간질을 했다. 말도 안 되는 요구를 일삼고 들어주지 않으면 바로 전쟁을 선포했다. 게임 개발자가 이렇게 설정해 놓은 간디를 보고 있으면, 실제 간디의 인성까지 의심스러웠다.


이런 나와는 달리 제이는 간디 때문에 애먹은 경험이 그다지 없었다. 제이는 무조건 전쟁을 일으켜 다 쓸어버리는 정복승리를 목표로 했기에, 인도를 아예 초반에 함락시키는 듯했다.


“인도 문명 특성이 좋아서, 초기에 때려 부수지 않으면 나중에 힘들어. 전쟁 싫어도 인도는 초반에 없애고 가는 게 나아.”


제이는 내 노트북의 문명을 실행시키며, 자신의 공략 방법을 내게 알려줬다. 내가 바로 게임을 할 수 있도록 기본 설정을 조작하는 중이었다. 나는 그런 제이의 무릎을 베고 드러누웠다. 문득 간디와 제이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제이, 너 지금 게임 속 간디랑 조금 비슷한 것 같아.”

“무슨 뜻이야?”

“너도 평소에 순하고, 싸움 한 번 안 하잖아. 듣기 싫은 말 들어도 그냥 헤헤 웃기만 하고. 그런데 지금 때려 부수라는 거 보고 있자니, 딱 간디야.”


제이는 우리 학과에서 착하고 순한 사람으로 통했다. 얼굴이나 눈매는 날카로운 편이라, 대부분 그의 첫인상만 보고 예민할 거라 오해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제이는 마음속에 담긴 말도 거의 꺼내는 법이 없었고, 모든 일에 그러려니 하며 둥글둥글 넘어가는 재주가 있었다. 그래서인지 다른 사람들한테 무리한 요구를 받을 때도 있었고, 짓궂은 장난을 받아줘야 할 때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제이가 다른 사람들한테 무시당하는 것 같아서 할 말은 하고 살라 했지만, 제이는 그런 내게도 사람 좋은 웃음으로만 일관했다.


“그런가? 공격할 땐 해야지.”

“네가 그런 말 하니까 놀랍다.”


비폭력 저항을 외치던 간디가 게임 속에서는 거침없이 약탈하고, 유혈사태를 일으키는 것처럼 현실의 제이도 필요하다면 싸움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내가 굳이 싸울 일이 없어.”

“어떻게 없을 수가 있어?”

“아까 네가 그랬잖아. 간디가 아무래도 자기가 폭력적인 걸 숨기려고 비폭력주의를 주장한 것 같다며.”

“게임 속에서 그렇다는 거지. 그래서 제이, 너도 실제로는 폭력적이라고?”


“그런 뜻은 아니고. 사실 무언가를 강하게 주장한다는 건, 그 반대의 입장도 정확히 안다는 거잖아. 간디가 비폭력을 주장할 수 있던 이유는 폭력이 뭔지도 정확히 알고 있었단 뜻이야.”

“그래서?”


“나는 잘 모르거든. 나에게 시비를 걸어도, 그게 시비인 줄 몰라. 지금껏 그렇게 심하게 굴었던 사람이 없어서일 수도 있고, 내가 무던해서 그럴 수도 있지. 어쨌든, 공격인 줄 모르는데 어떻게 기분 나쁘다고 소리를 지르겠어. 나중에 안다 해도, 이미 지나간 거니 어쩔 수도 없고. 그러다 보니 싸울 일이 없던데.”


그러니까 내가 두들겨 맞기도 전에 쿡쿡 찌르기만 해도 공격이라 생각하고 화를 버럭 낸다면, 제이는 아예 두들겨 맞을 때까지는 공격이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기 때문에 아무렇지 않단 뜻이었다. 왠지 어리석은 대답인 것 같으면서도 한편으로는 참 현명한 대답인 것 같기도 했다. 어쨌건, 제이다운 대답이었다.


“무슨 뜻인지는 대충 알겠다.”

“오늘 연이랑 싸웠다며. 나한테 톡 보냈던데. 미안하다고 전해달래. 나한테 네 기분도 풀어주라고 하더라.”

“싸운 건 아냐. 그냥 아무 말도 안 했을 뿐이지.”


제이에겐 말하지 않으려 했는데, 연이가 따로 제이에게 연락을 한 모양이었다. 나는 간단하게 대꾸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거야말로 비폭력 시위네.”


제이는 얄밉게 웃으면서 말했고, 나는 그런 제이의 옆구리를 손가락으로 푹 찔렀다. 간지럼을 타는 제이는 바로 항복을 외치며 두 손을 들었다.


간디가 폭력에 대해 잘 알기에 비폭력을 주장하는 것처럼, 나도 사람의 장점을 잘 알아보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사람의 단점도 남들보다 더 많이 보는 것 같단 생각이 들었다. 오히려 연이를 관심 있게 지켜보지 않았다면, 연이와 싸울 일도 없었을 거란 생각이 들자 괜히 다 내 탓인 것 같아 가슴이 답답해졌다.


“오늘은 게임하지 말고, 그냥 한숨 자.”


제이는 여전히 자신이 무릎을 베고 있는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나는 제이의 말을 들으며 아무 대답 없이 그대로 눈을 감았다. 잠결에 이불을 덮어주는 제이의 손길이 느껴지는 것 같기도 했다.



<다음 화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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