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폭력주의의 역설(2)

[오늘도, 사람!]

by 별체



낯선 이의 차가운 말보다 가까운 이의 무심한 말이 더 큰 상처로 다가온다. 내가 좋아하는 사람은 언제든 내게 가장 나쁜 사람이 되기도 쉽다는 뜻이다. 나 역시도 나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누구보다 잔인하고, 냉정하고, 너무한 사람이 된 적도 있다. 누구나 자신을 챙기다 보면, 상대의 사정이나 마음에 대해 잊는 일이 종종 생기기 때문이다.



확실히 살아오면서 나를 가장 괴롭게 했던 사람들은 내가 소중히 여긴 사람들이었다. 나는 결국 그들이 소중하기 때문에 괴로움을 견뎌내는 일을 반복하며 살아왔고, 그건 앞으로도 계속될 일일 것이다. 하지만 가끔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다 내려놓고 싶을 때가 있다.



눈을 뜨니 주변이 어두컴컴했다. 언제부터인지 모르게 제이도 내 옆에서 곤히 자고 있었다. 창 밖에서는 여전히 빗소리가 들려왔다. 머리맡에 놓인 핸드폰을 켜보니 새벽 3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애매한 시간에 잠이 들어 모호한 시간에 깬 모양이다. 한 번 눈을 뜨면 다시 잠들기 쉽지 않기에 슬그머니 일어났다. 제이가 깨지 않도록 조용히 옷장을 열어 그의 카디건 하나를 꺼내 걸쳤다. 그리고 우산을 챙겨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나섰다. 잠시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올 예정이었다.



제이의 집에 올 때 내리던 거센 비바람 대신, 이제는 약한 빗방울만 내리고 있었다. 바람도 거의 불지 않는 듯했다. 우산을 펼쳐 걸으려는 순간, 뒤에서 문을 여는 소리가 들렸다. 제이였다. 잠귀가 밝은 탓에 깬 모양이었다.



“미안, 나 때문에 깼구나.”

“아냐. 어디 가?”

“잠깐 산책할까 하고. 들어가서 더 자.”



제이는 잠에서 잘 깨기도 하지만, 다시 잠드는 것도 곧잘 해냈다. 깨워서 미안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제이에게 들어가라고 손을 휘저었다. 하지만 제이는 다시 집으로 들어가는 대신, 내 우산 속으로 쏙 들어왔다. 내가 들고 있던 우산을 자신이 들더니 내게 팔짱을 끼라고 팔을 툭툭 쳤다.



“비도 오고 사방이 깜깜한데 혼자 돌아다니면 위험해.”



나는 못 이긴 척 제이의 팔짱을 꼈다. 그리고 동네를 걷기 시작했다.



“나 언제 잠들었어?”

“내가 자라고 말하기도 전에 이미 곯아떨어진 것 같던데. 오자마자 잤으니까 한 5시쯤?”

“헐, 나 10시간이나 잤어?”

“어제 밤새웠잖아. 그럴 만도 했어.”



생각해 보니 전날 꼴딱 밤을 새운 것치고는 적게 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저 허탈하게 웃으며 제이와 계속 걸었다. 비 오는 새벽에도 아무 불평 없이 함께 걸어주는 제이가 고마웠다.



제이는 비 오는 날을 싫어했지만 내가 비 오는 날을 좋아했기 때문에 늘 함께 걸었다. 제이는 전생에 내가 탈수로 죽은 가난한 천민일 것 같다고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매번 여행지는 바다만 고집하고, 비 오는 날만 나가고 싶어 하냐면서 말이다.



제이의 말대로 나는 바다를 좋아했고, 비가 오는 것을 좋아했다. 비 오면 우울해진다는 다른 사람들과는 다르게 나는 유독 기분이 더 들뜨곤 했다. 비가 툭툭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면 왠지 신이 나서 더 활동적인 사람이 됐다.



집순이라 대개는 집 안에 있는 걸 좋아하는데, 이상하게 비 오는 날은 자꾸 밖으로 나가 걸어 다녔다. 정말 내 전생이 탈수로 죽은 가난한 천민이라면, 왠지 다음 생은 물을 피해 다니는 고양이가 되지 않을까 하는 상상을 하며 동네 한 바퀴를 돌고 집으로 돌아왔다.



잠이 다 깬 제이는 돌아와서 다시 문명 5를 켰다. 나도 게임을 켤까 했지만, 왠지 내키지 않았다. 최근에 미친 듯이 했기에 조금 질리는 듯했다. 그냥 제이가 플레이하는 걸 지켜보기로 했다.



나름 오랜 시간 플레이한 제이는 또다시 전쟁을 준비하기 위해 다른 나라에 스파이를 보내고 있었다. 스파이는 다른 나라에 몰래 잠입해 헛소문을 퍼뜨리거나, 군사기밀을 빼오는 유닛이었다. 그것을 본 나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스파이 아주 지긋지긋하다.”

“왜? 스파이가 얼마나 중요한데.”

“인도가 자꾸 스파이 보내서 나 멸망시켰어. 다시 생각하니까 열받네. 간디가 너무 싫어졌어.”



내 말을 들은 제이는 피식 웃고는 게임 내의 정치와 외교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넌 요령이 없어. 고상하게 외교관 보내면 다 될 줄 알지? 원래 빛나는 곳엔 그림자도 있는 거야. 스파이가 진정한 정치고 외교지.”



일명 스파이 찬양론을 펼친 제이를 보며, 나는 퉁명스럽게 대꾸했다.



“정치, 외교 같은 소리 하네. 그렇게 잘 안다는 사람이 왜 간디가 한 나라의 대표자였던 적이 없는 건 모르는지, 원.”



내 말을 들은 제이는 잠시 화면에서 눈을 떼고 나를 쳐다봤다.



“진짜? 이 게임 다 왕이나, 황제들만 나오잖아.”

“내 말이. 우리나라도 세종대왕, 중국도 측천무후, 로마도 아우구스투스, 미국도 워싱턴, 프랑스도 나폴레옹 등 뭐 죄다 왕이나 황제들인데, 간디만 혼자 급 떨어지지.”

“간디도 인도 대통령 같은 거 아니었어?”

“그냥 정치인이지, 왕은 무슨. 그냥 인도하면 간디가 젤 유명하니까 개발자가 그렇게 세팅했나 봐.”


제이는 도저히 못 믿겠다는 듯이 내 노트북의 인터넷을 켜서 검색을 하더니 입을 떡 벌렸다. 그러더니 다시 속없는 소리를 해댔다.



“와, 대통령도 아닌데 대통령보다 더 유명한 것도 능력이다. 대단한데?”



실컷 간디가 싫다고 욕했는데, 내 앞에서 간디를 칭찬하는 제이를 보고 있자니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아, 몰라. 간디 칭찬하지 마.”



나의 투덜거림에 제이는 바로 말을 멈췄다. 슬쩍 내 눈치를 보더니 다시 게임에 집중했다. 나도 더 이상 말을 잇는 대신, 제이가 플레이하는 것을 가만히 지켜보기만 했다. 시간이 조금 지나자, 조용히 있던 내게 제이가 슬쩍 물었다.



“연이랑 왜 싸웠어?”

“안 싸웠다니까.”

“그래, 아무 말도 안 하고, 비폭력 시위했다며. 왜 그랬냐고.”

“걔가 스파이처럼 헛소문 퍼뜨려서.”

“너 오늘 잘도 갖다 붙인다?”

“비 오는 날 버프야. 평소보다 머리가 더 좋아져.”



일시적으로 지능이 강화됐다며 태연하게 대답하는 나 때문에 제이의 웃음이 터졌다. 그리고 조금 더 자세한 얘기를 듣고 싶어 했다. 애초에 제이한테 말하지 않으려 했던 일인데 자꾸 채근하는 눈빛에 못 이긴 나는 입을 열었다.



“내가 너 만나기 전에, 경훈 오빠 좋아해서 한참 쫓아다닌 걸 아무것도 모르는 교양수업 애들한테 멋대로 얘기했어.”



제이는 의아해하며 내게 되물었다.



“너 그런 걸로 화 안 내잖아? 그냥 웃고 넘기지 않아?”

“그건 우리 과에서 이미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 그런 거지. 우리 다 같은 과니까. 그런데 다른 과 사람들은 아니잖아. 심지어 내가 경훈 오빠를 쫓아다니던 그 시기에 걔는 이 학교에 없었어. 나한테 들은 얘기만 가지고 생판 모르는 사람들한테 막 떠벌린 거야.



그리고 그게 언제 적 얘긴데. 그 일 있고 나서 내가 제이, 너랑 사귄 게 벌써 일 년이 넘었어. 이제 와서 그 얘기를 왜 해? 경훈 오빠도 다른 여친을 벌써 이 년째 만나고 있는데. 이건 나한테만 잘못한 게 아니라, 우리 셋한테 전부 잘못한 거야.”



제이의 채근에 나도 모르게 속사포처럼 이야기를 털어놓았지만, 조금 불안했다. 내가 별것도 아닌 걸로 화를 내는 것 같아 걱정도 됐고, 혹시 제이가 내 편을 들어주지 않으면 나의 화는 걷잡을 수 없이 폭발할 것 같았다. 제이는 내 말을 듣고 곰곰이 생각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걔가 경솔했네.”



제이의 그 말에 순식간에 마음이 가라앉았다. 내 편이 주는 안정감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제이가 이해하는 듯하자 내 입에서는 참았던 서운함이 몰아치듯 터져 나왔다.



“그리고 잘못은 내가 보는 앞에서 해놓고 왜 제이, 너한테 연락하는데? 난 그것도 싫어.”



연이는 나의 가장 친한 동기였지만, 우리는 가끔 서로에게 가장 나쁜 사람이 됐다. 나는 그녀가 생각 없이 하는 말들에 화가 났고, 연이는 그때마다 입을 꾹 다물고 한마디도 안 하는 내게 서운함을 감추지 못했다. 나는 연이가 내 주변의 모든 관계를 조금씩 엉망으로 만드는 것 같다는 생각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연이의 이런 일은 처음도 아니었다. 지난번에는 내가 연이에게만 털어놓았던 개인적인 일을 학과 동기들에게 늘어놓기도 했고, 제이 몰래 준비했던 이벤트를 나 몰래 제이에게 연락해 미리 알려주는 일도 있었다. 그 뒤로 나는 조금씩 연이에게 비밀 이야기를 털어놓지 않게 됐는데 이런 일이 터진 것이었다.



“사실, 연이가 나한테 대충 이야기하더라. 자기가 말을 함부로 했대. 나한테도 미안하다면서 꼭 전해달라더라.”



“그러니까, 그 얘기를 왜 너한테 하냐고. 난 걔랑 그런 일 있었다는 거 말 안 하려고 했는데, 걔가 또 미리 말해서 넌 이미 알고 있었네. 걔는 내가 말하기 싫은 걸 자꾸 강제로 공개하게 해. 그리고 나한테 연락 안 하고, 굳이 내 남친한테 자꾸 연락하는 것도 상식적으로 이상하지 않아?”



제이는 내 마지막 말이 정말 의외라는 듯이 쳐다봤다. 지금껏 내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말이었기 때문이다.



제이와 나, 연이는 모두 같은 학과, 같은 학년으로 일주일 내내 같은 전공수업을 듣기 때문에 굳이 연락을 주고받는 것까지 뭐라 하고 싶진 않았다. 연락이 오면 모든 내용을 제이가 보여주기도 했고, 제이가 먼저 연이에게 연락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기 때문이다.



연락도 별 내용은 없었다. 주로 내 얘기였다. 그래도 자꾸 제이에게 연락하는 연이가 이해되지 않아 마음이 날카로워졌다. 제이는 내가 가장 가까이 지내는 연이 때문에 이 정도로 스트레스받고 있는지 전혀 몰랐던 것 같았다.



“그냥 다 짜증 나.”



벙찐 제이의 표정을 뒤로한 채, 나는 한껏 성질을 부리며 등 돌려 앉았다. 말로 감정을 꺼내놓으니 화가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았다. 제이는 이미 오랜 경험으로 이럴 때 내게 말을 걸면 안 된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제이는 말을 건네는 대신 등 돌린 나를 뒤에서 꼭 안았다. 이제는 나도 제이가 이런 행동을 하면 무슨 뜻인지 안다. 나는 한숨을 푹 쉬며 마지못해 입을 열었다.



“알아, 화 풀라는 거지?”

“아니. 그냥 내가 미안하다는 거야.”



굳이 제이가 내게 사과할 필요는 없었지만, 그냥 잠자코 들었다. 이대로 있는 게 더 나을 것 같았다.


“나 한마디만 해도 돼?”

“뭔데?”

“연이가 무서워서 너한테 연락 못하고 나한테 했대. 네가 강의시간은 물론 기숙사 오는 내내 말 한마디 없었다며. 용기가 안 났대. 나쁜 의도로 말하는 애는 아니잖아. 남을 웃기고 싶은 욕심이 과해서 그런 거지.”



연이가 별 뜻 없이 말한다는 건 누구보다 내가 제일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누군가를 웃기고 싶어서라는 것도. 그랬기에 나도 벌컥 화를 내는 대신, 말을 아끼는 걸 택했다. 말을 할 때마다 잃을까 걱정되는, 어떤 것들을 떠올리면서. 그 무언의 모습이 내겐 나름의 비폭력이었는데, 연이에게는 폭력이었던 모양이다.



“알아. 날 밝으면 연락해 볼게.”



결국 나는 졌다는 듯이 말했고, 제이는 잘하는 거라며 내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렸다. 나는 하지 말라고 한껏 째려보고는 제이 대신 노트북 앞에 앉았다.



“나 이거 해도 되지? 여기서라도 마음껏 폭력적이고 싶다.”

“잘 됐다. 간디랑 전쟁 중이야. 다 없애버려.”

“그래, 어디 유혈사태 한 번 일으켜 보자!”



지난 일주일 내내 나를 굴복시키던 간디에게 신나게 핵을 쏘아댔다. 이미 게임이 막바지였기에 무척 수월하게 인도를 정복할 수 있었다. 처음으로 승리했다는 엔딩 크레디트를 보며 나는 그 자리에 그대로 누워 버렸다.



폭력도, 비폭력도 모두 정확히 알고 있어야 한쪽을 주장할 수 있다는 제이의 말이 떠올랐다. 동시에 누군가의 장점과 함께 단점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앎이란 게 점점 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커지는 것 같았다. 이번에도 나는 누군가의 장점을 골라야 할 테지만, 왠지 한 번 멈칫하게 된다. 더 최악으로 치닫기 전에 이쯤에서 관계를 포기하고, 좋은 추억으로 남기는 게 낫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번에도 믿어보고 싶은 길을 선택한다. 도저히 믿을 만하지 않은 것 같아도 자주 그랬다. 그럴 때마다 혹시 나는 이러려고 태어난 게 아닐까 싶어 진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서 하필 내 눈에 누군가의 장단점이 뚜렷하게 보인다면 분명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 별 수 있나. 그냥 걸어가는 수밖에. 소중한 것들이 날 가장 괴롭게 한다는, 그 역설을 떠올리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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