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단편소설입니다.
* 글의 재미와 저자 고유의 글맛을 살리기 위해 표기와 맞춤법에 예외를 둔 부분이 있습니다.
● REC (주아영_가명)
제가 좀 늦었죠. 죄송해요. 아이가 아직 세 살밖에 안 돼서 제가 없으면 난리가 나거든요. 아이를 친정엄마한테 맡기고 왔는데도 계속 떼를 써서 달래느라 한참 애먹었네요.
아, 남편은 해외 출장 중이거든요. 말이 나온 김에 이거 익명이 보장되는 건 확실하죠? 제 남편은 제가 한 번 결혼했다는 걸 몰라요. 혼인신고를 하진 않아서 서류에 기록이 남은 건 아니지만 어쨌든 일가친척들 모셔놓고 결혼식이란 걸 하긴 했으니까요. 제 남편이 알면 얼마나 배신감이 들겠어요. 꼭 익명 보장은 지켜주셔야 해요.
사실 하진이를 마지막으로 봤던 게 벌써 4년이 넘었는데, 제가 해줄 말이 얼마나 있을지는 모르겠어요.
작가라고 하셨죠? 하진이 생일 기념으로 책을 써서 선물하신다니 놀랍네요. 하진이한테 이렇게 각별한 작가 친구가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거든요. 결혼식장에서도 뵙지 못한 것 같은데요. 하진이가 직접 연락하지 않았으면 이 인터뷰는 응하지 않았을 거예요.
하진이는 잘 지내고 있나요? 목소리가 좋진 않던데, 갑자기 제게 인터뷰를 요청한 것도 이상했고요. 아니다, 그냥 얘기하지 마세요. 잘 지내든 못 지내든 어느 쪽도 기분이 좋진 않을 것 같네요. 그래서 어떤 걸 얘기하면 되죠? 하진이에 대한 이야기면 뭐든 상관없다는 거죠?
말씀드렸다시피 저는 하진이랑 2년 연애하고 결혼식까지 올렸던 사이예요. 끝이 좋진 않았지만. 아, 그렇다고 해서 악감정이 있는 건 아니에요.
애초에 하진이랑 헤어진 것도 우리 둘 문제는 아니었어요. 대단하신 하진이 어머님 때문이죠. 처음부터 저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거든요. 제가 대학 때 활동하던 동아리가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말이에요. 고작 그런 이유 때문이란 게 어이없죠? 하진이가 제게 그 얘길 전했을 때는 말도 안 된다고 했어요.
어머님은 유명 로펌의 변호사셨거든요. 변호사가 토론 동아리를 싫어한다는 게 웃기지 않아요? 심지어 하진이도 같은 동아리였어요. 우리는 대학 동아리에서 처음 만났거든요.
하진이가 동아리에 들어왔을 때 저는 무척 의아하게 생각했어요. 보통 1학년 때 동아리를 가입하는데, 하진이는 3학년이 돼서야 들어왔거든요. 그것도 의대생이 말이에요.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할 시기에 들어온 것도 이상한데, 토론 동아리에 들어온 건 더 이상했어요. 의대생들은 보통 의대생 전용 동아리에 따로 가입하는 걸로 알고 있거든요. 심지어 토론 동아리는 인기 있는 동아리도 아니었어요. 오히려 늘 인원이 모자라서 당장 없어진다 해도 이상하지 않은 동아리였죠.
취업에 관련되거나 퍼포먼스가 화려한 동아리가 아니니까요. 다른 동아리에 들어가지 못한 루저들이 모인 동아리라는 인식이 강했죠. 실제로 하는 일이 없던 것도 맞고요. 만나서 술 마시고 노는 게 다였어요. 이런 상황에서 의대생이 들어온다고 하니까 회장이 옳다구나 하고 덜컥 가입시킨 거죠.
실제로 의대생이 가입했다는 소문이 돌자마자 동아리에 가입하려는 사람이 조금씩 늘어나더라고요. 고작 의대생 한 명 있는 게 뭐 그렇게 대단한가 싶었는데, 생각보다 의대생이랑 친해지면 나중에 도움 될까 싶어서 기회를 엿보는 사람들이 많더라고요.
회장이 신나서 막 신입을 받는 바람에 하진이는 꽤 곤란했을 거예요. 다들 하진이한테 어떻게든 말을 걸고 싶어 했거든요. 물론 하진이는 딱히 싫은 내색을 보이진 않았던 것 같아요. 누가 말 걸어도 차분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죠.
저는 그런 하진이를 보면서 쟤는 왜 여길 들어와서 고생을 사서 하나 싶었죠. 나라도 가만있어야겠다 싶어서 먼저 말을 걸지 않았어요. 얼굴도 제대로 쳐다본 적 없었죠.
그렇게 두 달쯤 지났을 때였나. 술집 뒤풀이 자리에서 하진이랑 같은 테이블에 앉게 됐어요. 애초에 다른 테이블이었는데 하진이가 제 테이블로 자리를 옮겨 왔더라고요. 대뜸 맥주 500cc를 원샷하더니 왜 자신한테 말을 걸지 않는지를 물었어요. 그래서 지금도 이미 유명인인데 나까지 말 걸어줘야 하는 거냐고 물었더니 막 웃더라고요. 하진이가 그렇게 크게 웃은 건 처음이었어요.
저는 그제야 하진이 얼굴을 제대로 봤죠. 뭐랄까, 엄청 잘생긴 얼굴은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못생긴 점을 찾을 수도 없었어요. 그냥 깔끔하게 생겼다, 이 정도?
얼굴보다 더 선명하게 기억 남는 건 맥주잔을 쥐고 있던 손가락이요. 남자애 손가락이 이렇게 하얗고 가늘고 길 수 있나 싶었죠. 지금 생각하니 여태껏 본 사람들 중에 손이 제일 예뻤던 것 같아요. 울퉁불퉁하지도 않고 손톱도 단정하게 잘 정돈되어 있었죠. 저는 사람들 손을 유심히 보는 버릇이 있거든요. 손이 예쁜 사람을 좋아해서요.
저도 모르게 손을 보고 있는데 하진이가 다시 말을 걸었어요. 자신한테 말을 많이 해달라고 하더라고요. 침묵이 견디기 힘들다고 했어요.
그때는 별생각 없이 들었죠. 그런 사람들 생각보다 많잖아요. 대화 중간에 침묵이 흐르면 자기 탓인 것 같아서 뭐라도 생각나는 대로 막 말하면서 분위기 주도하다가 집에 가서는 왜 그런 말을 했을까 하고 후회하면서 이불 뻥뻥 차는 사람들. 내가 아니라 다른 사람이 말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고 매번 바라는 그런 사람들이요.
저도 그런 타입이라 하진이도 그런가 보다 했어요. 그래서 토론 동아리를 들어온 거냐고 물었더니 반은 그렇고, 반은 어머님을 골탕 먹이고 싶어서라더군요.
토론 동아리에 들어온 게 왜 어머니를 골탕 먹이는 일인지 물었더니 말없이 웃기만 하더라고요. 클럽 죽돌이도 아니고, 마약을 하는 것도 아니고, 나쁜 짓을 하고 돌아다니는 것도 아니고, 겨우 동아리에 가입한 게 뭐가 문젠지 이해할 수가 없었어요. 우리가 좀 인기 없는 동아리긴 했지만요.
어쨌든 대학생이나 됐는데 부모님이 자식 동아리에 간섭한다는 게 이상했지만 더 물어보진 않았어요. 하진이가 말하길 원하지 않는 것 같았거든요. 그저 의대생 집안의 치맛바람이 이 정도인가 추측할 뿐이었죠.
화제를 전환해서 다른 소소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죠. 주량이 어떻게 되는지, 어떤 노래를 좋아하는지, 취미는 뭔지 같은 그런 이야기요. 그때 서로 뭐라고 대답했는지까지는 기억이 안 나요.
아마 저는 적당히 내숭을 섞어서 대답했을 거예요. 실제로는 소주 두 병 마시는데 반 병이라고 말하던가, 락발라드를 좋아했지만 그냥 발라드를 좋아한다고 대답했을 거예요. 취미는 방구석에 틀어박혀 드라마 보기였는데, 박물관이나 전시관 다니는 걸 좋아한다고 말했겠죠. 다들 그러지 않나요?
아무튼 시답지 않은 얘기를 한창 늘어놓는데 하진이가 갑자기 제게 사귀자고 하더라고요. 그날이 처음 대화한 날이었는데 무슨 소린가 싶었죠. 취했냐고 물어봤더니 그건 아니래요.
전부터 계속 좋아했는데 말할 기회가 없었다고 했어요. 그러더니 제가 시끄러운데 시끄럽지 않아서 좋다더라고요. 무슨 귀신 씻나락 까먹는 소리를 하냐며 말을 똑바로 하라고 했더니 그 말만 반복하더라고요.
아무리 봐도 취한 것 같아서 맨 정신에 다시 얘기하려고 했는데 함께 있던 동아리 사람들이 모두 들은 거예요. 당장 고백을 받으라며 난리가 났죠. 그 함성에 못 이겨 얼떨결에 하진이랑 사귀게 됐어요.
혹시 다음날 딴소리 하는 거 아닌가 걱정했는데, 다행히 그런 일은 없었어요. 사귀는 기념이라면서 꽃다발을 가지고 왔더라고요. 손편지까지 적어서요. 만나줘서 고맙고 앞으로 계속 예쁘게 만나자고 적혀있었죠.
하진이의 글씨체는 자신의 손처럼 정갈하고 예뻤어요. 저는 어디서 대필해 온 줄 알았는데 자기 글씨체더라고요. 여자가 쓴 글씨인 줄 알았는데 말이에요. 공부할 때 하도 필기를 많이 해서 그런 거라고 했지만 사실 관계없는 이야기잖아요. 그냥 걔 글씨체가 예뻤던 거지.
저는 그 뒤로도 하진이에게 손 편지를 무척 자주 받았어요. 내용이 특별할 건 없었어요. 간단하게 한두 줄의 쪽지를 남길 때도 있었고, 기념일에는 좀 더 정성 들여 길게 쓴 편지를 가지고 왔죠.
남자가 편지를 그렇게 많이 쓸 수 있다는 게 참 신기했어요. 주변에서는 군대 간 남친과 편지를 주고받냐고 할 정도였어요. 아, 군대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하진이는 군대 면제였어요. 왜 면제인지는 못 들었네요. 제겐 그냥 아파서 그런 건 아니라고만 했어요.
아, 하진이는 그림을 무척 잘 그렸어요. 가장 많이 그렸던 건 풍경화였는데 대충 연필로 쓱쓱 그려도 금방 작품이 나오더라고요. 저는 하진이가 공부보다는 미술 쪽에 더 재능이 있다고 느낄 정도였어요.
물론 의대생이었으니까 공부머리도 대한민국 상위 1%겠지만, 뭐랄까 공부할 때는 항상 겨우 힘을 내서 하는 느낌이었다면, 그림은 아무 힘도 들이지 않고 순식간에 손쉽게 그려내는 느낌이었어요.
왜 미술 쪽으로 진로를 잡지 않았냐고 물었는데, 그 정도는 아니라고 손사래를 치더라고요. 의대생은 그림 그릴 일이 많아서 다들 그림 실력이 좋다는 말을 덧붙였지만 누가 봐도 그 정도의 실력은 아니었어요.
무엇보다 그림 그릴 때 하진이의 표정을 보면 확실했죠. 하진이는 미술 쪽으로 나가고 싶어 했다는 걸. 그런데 인물화는 안 그리더라고요. 나를 그려달라고 조른 적 있는데, 사람은 안 그린다고 단호하게 거절했어요. 무섭다더라고요.
아무튼 하진이는 무척 다정한 사람이었어요. 데이트를 할 때 한 번도 가볍게 나온 적이 없어요. 늘 데이트 코스를 짜고, 바쁜 의대생 스케줄 속에서도 어떻게든 틈만 나면 절 만나러 왔어요. 이것저것 이벤트도 많이 해줬죠. 다들 제게 유니콘 같은 남친을 만난다며 너무 부럽다고 했어요.
저 역시도 제가 전생에 나라를 구했나 싶을 정도였으니 말 다했죠. 저도 하진이가 해주는 만큼 잘하려고 노력했는데 그 애가 어떻게 생각했을지는 모르겠어요. 만나면서 크게 싸운 기억도 별로 없네요. 하진이나 저는 둘 다 눈치가 빠른 편이었거든요. 서로 싫어할 행동은 잘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혹시 싸울 일이 생겨도 하진이는 대화로 풀어나가는 걸 좋아했어요. 다른 남자애들처럼 욕을 하거나 거칠게 말하지 않았어요. 이건 제가 아닌 친구들이랑 대화할 때도 다르지 않았어요. 어릴 때부터 바르게 말하는 게 습관이 됐다고 하더군요.
확실히 대화가 잘 된다는 건 엄청난 장점이었죠. 말이 잘 통하니까 우리는 잘 맞는 커플이라는 생각을 항상 했던 것 같아요.
가끔 하진이가 멀리 있다는 느낌을 받을 때도 있긴 했어요. 뭐랄까, 분명 다정하고 착한 사람이지만 내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다고 해야 하나.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어요. 같이 제주도 여행을 갔는데 숙소를 호텔로 잡았거든요. 당연히 조식 포함해서요. 저는 지방이 고향이라 대학교에 입학하면서 자취를 시작했어요. 혼자 대충 차려먹거나 편의점에서 김밥 사서 식사를 때우는 게 대부분이다 보니 호텔 조식이 얼마나 신났겠어요. 잔뜩 음식을 퍼와 바다를 보면서 식사를 하는데 정말 좋더라고요. 저도 모르게 ‘아, 행복하다.’라는 말을 했는데 그때 하진이가 저를 보던 눈빛을 잊을 수가 없어요.
마치 행복하다는 말을 처음 들어본 사람 같았어요. 이상하게 보는 것 같기도 하고, 신기하게 보는 것 같기도 하면서 무척 슬퍼 보였다고 해야 할까. 그럴 분위기가 전혀 아니었는데도 툭 건드리면 눈물을 쏟을 것 같은, 하여튼 엄청 오묘한 눈빛이었어요.
그러더니 저한테 행복하다는 말을 입 밖으로 꺼내본 적이 많냐고 묻더라고요. 저는 그렇다고 했죠. 좋은 풍경만 봐도 행복하고, 맛있는 거 먹으면 행복하고,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으면 행복하고. 행복이 뭐 별거예요? 내가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는 게 행복이니까요.
그런데 하진이는 제 대답을 듣더니 자신은 행복하다는 감정이 뭔지를 모르겠다고 하더라고요. 좋은 풍경이 나랑 무슨 상관이고, 맛있는 걸 먹는 게 왜 내 행복과 연관되는지를 되묻더라고요. 사랑하는 사람이랑 같이 있어도 한없이 외로울 때가 있는데 어떻게 행복하다고 단정 짓는지도 물었어요.
할 말이 없더라고요. 저는 하진이의 질문조차 이해할 수 없었으니까요. 그냥 너무 진지하게 굴지 말라고 하진이 팔을 툭 치고 말았죠.
나중에 하진이한테 프러포즈를 받고 하진이 어머님을 뵙고 나서야 왜 하진이가 종종 멀게 느껴졌는지 그 이유를 알 것 같았어요. 하진이가 저를 어머님에게 처음 소개해주던 날, 어머님은 제게 단 한마디도 걸지 않으셨거든요. 하진이의 말에도 한마디 대꾸도 없이 식사만 하시더니 인사도 없이 가버렸죠.
나중에 이유를 들었어요. 하진이가 아주 어릴 때부터 마음에 안 드는 행동을 하면 한마디도 하지 않으셨다더군요. 저를 데려온 게 마음에 안 드셨던 거예요. 제가 말이 많아서 싫다고 하셨다던데, 어머님이 말을 한마디도 안 하시니 당연히 제가 말을 많이 할 수밖에 없잖아요? 조금 억울했어요.
사실 저는 하진이의 프러포즈에도 고민을 많이 했거든요. 만난 지 2년 되던 기념일에 바로 프러포즈를 하더라고요. 저는 그때 제가 너무 어리다고 생각했어요.
대학을 막 졸업해서 회사에 취직한 지 얼마 안 됐을 때기도 했고, 무엇보다 하진이는 그때 대학교를 휴학 중이었어요. 본과 2학년까지 마치고 휴학하다니 극히 이례적인 케이스였죠. 의사가 되고 싶지 않다며 다른 진로를 찾는다고 했어요. 이제 와서 다른 진로라뇨. 그런 상황에서 결혼은 무슨 결혼이에요.
무슨 돈으로 결혼하냐고 물었더니 어머님이 다 지원해 주신다는 말을 하더라고요. 사귀면서 한 번도 하진이가 철이 없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그때만큼은 무척 어린애처럼 느껴졌어요.
나를 그렇게 싫어하신다면서 무슨 돈을 지원해 주냐고 화를 벌컥 냈는데, 다음 날 2억이 찍힌 통장을 가져오더라고요. 강남에 따로 집도 구해주신다고 하셨대요. 그러더니 우리 집까지 찾아와서 제 부모님께 저를 달라며 무릎을 꿇었어요.
부모님은 당연히 선뜻 수락하기 어려워하셨어요. 무엇보다 이제 대학을 갓 졸업한 제가 모은 돈도 없이 결혼을 한다는 게 영 마음에 걸린다고 하셨죠. 하진이 어머님 태도도 문제 삼았고요.
그런데도 하진이는 굴하지 않고 몇날며칠을 우리 부모님을 찾아왔어요. 다시 복학해서 의사가 되겠다고 했고, 자신의 어머니와 저를 평생 만나지 않게 하겠다는 약속까지 하더라고요. 평생 신경 쓰일 일이 없겠다고 말하면서 정성을 쏟기에 결국 결혼을 결심했죠.
그런데 그렇게 열심히 결혼하자고 외치던 것과는 다르게 결혼을 결정한 순간부터 좀 이상한 태도를 보이더라고요.
결혼식을 가족과 친척들만 모아서 조촐하게 진행하자고 했어요. 어차피 저희 집은 부모님도 조그맣게 자영업을 하시는 분들이고, 친척도 없어서 올 사람이 많지 않았어요. 오히려 부모님이 변호사, 대학교수인 하진이네 집에서 손해였죠. 이건 저희 집을 배려해서 그런가 보다 했어요.
문제는 결혼을 했는데도 혼인신고를 하지 않더라고요. 왜 혼인신고를 하지 않냐고 물었는데 대충 얼버무리더군요. 요즘 트렌드는 몇 년 살아보고 도장을 찍는 거라나 뭐라나. 트렌드야 저도 잘 알지만, 결혼을 원하지 않던 제게 결혼을 밀어붙이던 사람이 하는 행동은 아니잖아요.
그래서 조금 다그치긴 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때 혼인신고를 하지 않은 건 정말 다행이었어요. 빼도 박도 못하게 이혼녀 꼬리표를 달 뻔했으니까요.
모든 비용을 시댁에서 마련했기에 살림살이도 전부 하진이 어머님이 마련해서 채워주셨거든요. 물론 제가 집에 들어와서 살기 전에 모든 준비를 마치셨죠. 자신의 어머니랑 무슨 약속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어찌 됐건 저랑 안 마주치게 하는 게 약속이었으니까요.
그런데 처음 신혼집에 들어온 날 뭔가 이상하더라고요. 자세히 살펴보니 집에 소리를 내는 물건들이 단 하나도 없었어요.
TV는 물론이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밥솥, 시계 등등 아무것도요. 하진이에게 물었더니 자신은 원래 그렇게 살았다더라고요. 입주 가정부가 밖에서 세탁도 다 해오고, 밥도 다 지어서 오고 그렇게 했대요. 어머님이 집에서 소리가 나는 것을 끔찍하게 싫어해서 그렇게 했다더라고요.
어떻게 사람이 그렇게 살 수 있나 싶었는데 하진이는 태어나면서부터 20년 넘게 그렇게 살았대요. 핸드폰도 항상 무음으로 해놓고, 컴퓨터나 전자기기에서 소리가 나지 않게 헤드셋이나 이어폰을 끼고 듣거나 그냥 아예 안 들었대요. 하진이의 본가에서는 하진이 방과 어머님 방의 거리가 한참 멀었는데도요.
집에서는 숨소리가 제일 큰 소리인 것처럼 그렇게 살았다는데,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죠. 그래서 자신은 침묵이 싫다고 한 거였어요. 고요함 속에서 숨 막히는 기분으로 항상 살아와서요. 하진이는 이제부터 제가 원하는 살림살이를 차차 들여놓으라고 했죠.
그래서 집에 물건을 하나둘씩 들여놓긴 했는데, 뭔가 하진이와 사이가 자꾸 틀어지는 기분이었어요.
하진이는 집에서는 말을 잘 안 하려고 했거든요. 누가 듣는 것도 아닌데 자꾸 작게 말하거나 대답을 하지 않았어요. 새로 놓은 밥솥에서 밥이 다됐다고 알림 소리가 날 때마다 깜짝깜짝 놀라기도 했어요. 소리에 무척 민감하게 굴더라고요. 그러면서도 아무것도 들리지 않을 때는 제게 말을 하라고 갑자기 소리치기도 하고 정말 종잡을 수가 없었어요.
저까지 덩달아 예민해지던 어느 날, 새벽에 물을 마시러 나왔는데 심장이 덜컥 내려앉고 말았죠.
하진이 어머님이 신혼집 부엌에서 밥솥 코드를 뽑아 밖으로 옮기고 있더라고요. 너무 놀라서 소리를 지르고 말았죠. 하진이도 잠에서 깨 거실로 나왔죠. 하진이는 어머님을 보고 아무 말도 하지 않더라고요. 저에게도 아무 말하지 않았어요.
저희의 결혼 생활은 그날로 끝이 났죠. 저는 그대로 아무 말 없이 제 짐을 싸서 나왔어요. 하진이에게서도 그 뒤로 연락 한 번 오지 않더라고요.
저는 그때의 상황이 뭐였는지 지금도 정확히 모르겠어요. 확실한 건 그 집에 더 있으면 제가 미쳐버릴 거라는 거였어요.
지금 생각해 보면 하진이는 이미 어머님 때문에 미쳐있던 것 같아요. 어머님과 연관된 것에만 이상한 행동을 보였으니까요. 그저 지금은 어머님의 굴레에서 벗어나 정상적으로 살고 있었으면 좋겠네요. 안부 전해주세요.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