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법을 알려주는 조언이 가뭄의 단비처럼 고마웠던 기억이 있다. 교원 임용 시험을 준비할 때였다. 유독 어렵게 느껴졌던 동양 윤리 파트에 매달려 씨름하고 있을 때, 함께 공부하던 친구가 말했다. 합격을 목표로 하는 시험에서 특정 부분에 필요 이상으로 너무 깊이 파고드는 것은 비효율적일 수 있다고, 그 노력을 배분하여 다른 파트를 확실하게 몇 번 더 보는 것이 최종 점수에는 더 유리할 것이라고 했다. 그 현실적인 조언 덕분에 나는 여러 파트에서의 공부 시간 균형을 잡았고, 시험을 잘 치를 수 있었다.
학교에서 처음 업무를 맡아 막막했을 때도 그랬다. 새 문서를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에 흰색 화면 앞에서 진땀을 빼는 나를 보고 선배 교사가 다가왔다. 작년, 재작년 선배들이 처리한 결재 문서를 먼저 열어보라고, 그러면 전체적인 업무의 흐름과 양식을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라고 일러주었다. 거기서부터 시작하면 일이 훨씬 수월해지고, 그렇게 공부를 하고 난 다음에도 모르는 것이 있으면 전임자에게 물어보았을 때, 질문받는 사람도 부담이 덜할 거라고 했다. 실로 명쾌한 해결책이었다. 이렇듯 막막한 현실의 벽 앞에서 건네받은 '방법'에 대한 조언은 캄캄한 바다에서 만나는 한 줄기 등대 빛과 같았다.
하지만 삶의 모든 문제가 이렇게 명확한 사용설명서처럼 해결되지는 않았다. 때로는 어떤 이정표보다 함께 걸어줄 동행이, 곁을 지키는 기다림과 공감의 태도가 더 절실한 순간도 있었다. 이야기를 잠잠히 들어주는 사람과 대화를 나누고 싶은 시간이 있었다. 감정의 급류에 휩쓸려 허우적거릴 때면, '이렇게 해봐'라는 조언이 꼭 물 밖에서 던져주는 마른 수건처럼 느껴지곤 했다.
슬픔의 한복판에서, 좋은 경험이라 생각하고 이제 그만 털고 일어나라는 말.
믿음이 깨져나간 파편의 자리에서, 사람을 보는 눈을 기르는 것이 좋겠다는 말.
이제는 한계라고 생각한 순간에서,
나 때는 더 힘들었다는, 그리고 사람은 원래 그런 과정을 겪어야 성장하는 법이라는 말들.
진심이 담긴 말이기에 마냥 흘려 들을 수만은 없는 그 무거운 조언을 품에 안고 가라앉았다. 내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이른 때에 다가온 것은 아닌가 싶은 말들을 붙들고서. 아직 나는 그 시간을 앓고 있는 중인데, 조언은 모든 것이 끝난 시점에서 건너왔다. 말을 건네는 이는 이미 잔잔한 강가에 앉아 있지만, 듣는 사람은 여전히 급류와 같은 소용돌이 속에 있는 듯한 어긋남. 그 속에서 조언자의 마음이 고마우면서도, 그것이 이미 해결된 삶이라는 사실에 부러움과 거리감을 동시에 느끼기도 했다.
무겁게만 느껴지던 조언의 형태는 대체로 그랬던 것 같다. 산전수전 다 겪은 사람의 지혜가 높은 봉우리나 깊은 바다와 같은 커다란 모습으로 다가오는 것. 상대방의 서투른 태도 앞에서 더욱 말하고 싶고, 알려주고 싶어지는 그런 것. 그러나 그의 여러 맥락을 고려하지 않은, 불균형한 삶의 이해와 성찰의 간극에서 비롯된, 엇박자로 쌓아올린 화음과 같이 되어버린 것.
더 나아가, 조언과 간섭 사이의 모호한 경계 그 어디쯤에 서성이는 말들을 마주할 때도 있었다. 그것은 조언이라고 하기에는 삶에 너무 깊이 침투했고, 간섭이라고 치부하기에는 '너를 위해서'라는 선의를 담고 있었다. 이러한 말들은 당장의 문제 해결을 돕는 방법을 알려주기보다, 삶의 방향키 자체를 돌리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어떤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이익이 되는지, 어떤 감정을 어떠한 방법으로 다룰지, 어떤 길을 선택하는 것이 현명한 것인지에 대한 문제 앞에서, 그들의 확신에 찬 신념과 가치관에 나도 따라 살아가야 할 것만 같았다.
그런 말들은 주체적으로 고민하고 판단하며 나아갈 힘을 앗아갔다. 스스로 부딪히고 깨지며 얻어야 할 성장의 기회가 지나가버리기도 했다. 미지의 영역을 향하며 넘어져도 보고, 길을 잘못 들어 헤매기도 하면서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나가야 하는데, 이미 다녀온 사람의 완벽한 지도를 쥐여주며, 어떤 상처도 입지 말고 그대로, 그리고 온전히 따라오라고 재촉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넘어지는 고통을 겪어야 단단한 근육이 생기고, 길을 잃는 막막함을 겪어야 자신만의 나침반을 갖게 되는 법인데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다른 모양의 지형을 걷는다.
그와 다른 시간을, 그와 다른 인격으로서 걷는다.
수많은 조언이 넘쳐나는 시대, 먼저 성숙한 존재가 되어 미성숙한 이의 곁을 지키는 기다림과 공감의 위로에 대해 생각해본다. 인생을 성실하게 살아온 선배의, 미숙한 존재가 주체적인 삶을 살아내도록, 결말이 뻔히 보이는 것만 같은 흐름 옆에서 훈수를 두지 않는 일에 대해서. 그것은 도와주고 싶은 자신의 욕구를 이겨내고, 인내로써 그를 격려하는 고도의 감정 절제일 것이다. 알고도 쉽게 말하지 않고, 보고도 가볍게 판단하지 않으며, 그 사람이 자기만의 리듬으로 자기 시간을 살아내도록, 깊게 뿌리내리는 성장을 일구어낼 수 있도록 지켜보는 사려깊음인 것이다.
시간이 흐르고 이따금씩 내게도 고민을 내어놓는 여러 존재들을 만났다. 그들과의 대화 끝에 스스로를 생각해보며 반성하곤 한다. 나는 그의 상황을 섬세하게 읽어주었을까? 내가 말하고 싶었던 이야기만 한 것은 아닐까? 내가 겪었던 상황을 어떤 기지로 벗어났음을 무용담처럼 떠들기만 한 것은 아니었을까? 그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상호적인 우리의 관계 안에서 조언하는 이에게 필요한 것은, 무조건적인 조언이나 일방적인 침묵이 아니라, 상대의 상황을 섬세하게 읽어내는 '분별력'일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상대에게 필요한 것이 실용적인 '방법'인지, 아니면 따뜻한 '공감'인지. 그의 문제가 해결책을 모르는 막막함인지, 아니면 그저 자신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이 필요한 외로움인지를 읽어내는 것.
진정한 지지는 상대가 자기 삶의 이야기를 직접 써 내려갈 작가라는 사실을 존중하는 데서 시작된다. 때로는 명쾌한 해결책을 제시하여 그의 시간을 아껴주고, 또 때로는 그가 자신만의 답을 찾을 때까지 묵묵히 기다려주는 것. 누구도 그를 대신 살아줄 수는 없음을 우리는 이미 알고 있다. 때문에 조언과 간섭 사이의 아슬아슬한 줄 위에서 우리가 지켜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상대방이 자신의 리듬과 속도로 온전히 성장할 수 있도록, 그의 삶의 주도권을 침해하지 않는 사려 깊은 거리를 유지해주는 일일 것이다.
그 한 사람이 자기만의 속도로 어떤 깨달음에 닿을 때까지 돕는 귀하디 귀한 일, 그리고 그의 삶에 새겨지는 통찰. 그 시간을 건너온 한 사람은, 결국 자신이 쓴 문장으로 정리된 삶을 가꾸며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문장은 필요한 순간에 방법과 공감을 가려내는 분별력이 되고, 사려 깊은 거리를 아는 지혜가 되어, 또 다른 누군가에게 온전한 곁을 내어주는 사랑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