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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마침표를 찍고 싶은 방식에 대해서

by StarCluster

그날 우리는 자신의 이야기에 마침표를 찍고 싶은 방식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최근 '산분장(散粉葬)'*이 법적으로도 허용되고, 또 그렇게 마지막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는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화두에 올랐다.

(*산분장: 화장한 유골을 산이나 바다 등 자연에 뿌리는 장례 방법)


한 친구는 자신도 산이나 바다에 흩뿌려지는 장례를 원한다고 했다. 그 편이 자연에 더 적극적으로 돌아가는 방식처럼 느껴진다는 이유에서였다. 물론, 우리는 그것이 아직 많은 이들에게 거부감을 준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다른 친구가 반문했다. "무덤이든, 납골당이든, 남은 사람들이 그리운 사람을 만나러 찾아갈 곳이 없어지는 거잖아. 조상님을 모시고 뵈러 오는 사람들도 많은데 말이야."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죽음은 남은 이들의 몫이기도 하니까. 나는 속으로 그런 생각들을 되뇌어 보다가 자신 없는 투로 말을 이어갔다. "그런데 그곳에 정말 내가 있을까? 나였던 흔적, 육신의 재는 거기 머물 수 있겠지만, 내가 살았던 마음이나 시간은 이미 다른 곳으로 떠나 있을 텐데…"




아무래도 죽음을 생각할 때마다 떠오르는 것은 남아 있는 사람들의 얼굴이다. 인간은 죽음으로 접어들며 분명 언젠가 그것을 '겪을' 존재이지만, 그와 동시에 누군가의 죽음을 '견디는' 존재이기도 하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지금껏 내가 견뎌왔던 누군가를 향한 슬픔과 그리움의 마음을, 나로 새겨진 남아 있는 사람들에게도 고스란히 선사하는 일. 어쩌면 동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덤덤히 서로의 죽음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인 셈이다.


우리가 나누었던 대화들과 농담들이, 사소했던 나날들이 사무치게 그립게 될 것이다. 그래서, 바로 그래서 나는 자유롭게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내가 없는 곳에서가 아닌 당신의 기억 안에서, 사랑으로 남긴 이야기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싶다는 마음으로.


흩어진다는 것은 비록 한 곳에 머무르지는 않지만, 어디에서든 기억되는 방식일지도 모르겠다. 뭉게구름 너머로 산들바람이 불어올 때, 물안개가 희미하게 피어오를 때, 혹은 따스한 햇볕이 살며시 내려앉을 때, 문득 '아, 그 사람은 이 날씨를 참 좋아했지—'라고 떠올릴 수 있다면 좋겠다.


그렇게 자연 속에 잠들어 아주 가끔씩, 불현듯 기억되는 존재가 되고 싶다. 결국 죽음이란 남은 이들의 삶 속에 어떤 형태의 '이야기'로 남을 것인가에 대한 마지막 질문일 것이다. 나는 어딘가의 한켠에 응어리로 가라앉은 무거움이 아닌, 바람에 실려 다니는 가벼운, 그리고 자유로운 이야기로 남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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