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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스리스 Aug 08. 2016

ㄱ. 견우와 직녀 이야기

(3) 분위기와 사람 수는 임을 찾을 확률에 대한 변수

 간밤에 가벼운 몸살을 앓았더니 아버지가 산에 오르지 못하게 했다. 대신 칠석이니 가서 니 색시감이나 찾아보라고 내쫓았다. 속으로는 색시는 무슨 색시여, 했지만 괜히 욱신거리는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조용히 나왔다.

 칠월 칠석엔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온 동네가 춤을 추며 놀았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 같이 떠들썩했지만 사실 가장 큰 재미는 젊은이들 차지였다. 전날 동네 여인네들이 모여 ‘직녀’를 뽑았었다. 견우는 어쨌는지 저쨌는지. 산은 지금까진 이런 행사엔 관심도 없었고 참여한 적도 없었기에 기대할 게 없었다. 그냥 가서 얌전히 구경이나 하고 오면 될 터였다.

 마을 공터는 장날에도 넓은 곳이었는데 오늘은 어째 좁아 보였다. 놀이판이 여기저기 펼쳐져 있었다. 동네 사람들이 죄다 모였는지 평소보다 머릿수가 크게 늘었다. 이리저리 떠다니는 생소한 향내들이 어지러웠다. 시끌벅적한 옷들 사이를 지나는 대신 산은 바깥으로 돌아 걸었다. 구석에 가 구경할 요량이었다. 걷다 조금 한산해졌다 싶었을 때, 누구네 집 담에 기댄 여인이 눈에 띄었다. 어울리는 이가 없는 것 같았다. 고개가 저쪽으로 향해있어 누군지는 보이지 않았다. 평소라면 그저 지나쳤을 테지만, 오늘은 평소가 아니었다. 게다가 발이 이미 그리로 향했으니 몸은 따라가야 했다.

  “동행은 없는 건가?”

 문득 들리는 소리에 걸음을 멈추었다. 어느 댁 한량이 덩치 큰 노복과 함께 있었다. 말 걸은 이가 저 자인 듯했다. 여인은 아무 말 없이 조금 비켜섰다. 산은 언뜻 보이는 눈꼬리에 시선을 빼앗겨 버렸다.

  “나랑 놀지.”

 사내는 명령조로 말했다. 눈을 가늘게 뜨고 입꼬리를 올린 채. 훑어보는 눈길이 거슬렸는지 여인이 입을 열었다.

  “가던 길 마저 가시지요.”

  “응, 가시던 길 다 갔는데. 놀자니까.”

 갓 쓴 놈팡이는 여인의 앞을 막아섰다. 같이 움직인 종놈 덩치가 산의 시야를 가렸다. 자기도 모르게 산은 성큼 가까이 다가갔다. 머리들 틈으로 여인과 눈이 마주쳤다.

  “왜 이제 오십니까?”

 여인이 산을 똑바로 쳐다보고 말했다. 이상하게 기분이 좋아져 산은 씩 웃었다.

  “사람이 많아 지체되었습니다. 이쪽은?”

  “그냥 지나가던 사람.”

  “뭬야?”

  “다들 기다리고 있습니다. 서두르죠.”

 감싸듯 길을 터주었다. 종놈이 산을 재보았으나, 돌잡이로 도끼를 잡았던 몸이라 만만치 않았다. 뒤에서 씨부렁대던 놈팡이는 침을 퉤 뱉고는 가버렸다.

 산은 여인의 발길을 따라 아무 말 없이 조금 더 걸었다. 흘끗흘끗 훔쳐봤지만 눈이 자리를 못 찾아 얻은 게 없었다. 여인과 이렇게 가까이 있기는 처음이었다. 주위는 분명 시끌시끌한데 귓가는 침묵으로 어색했다. 산은 입을 열었다.

  “임자는 왜······.”

 혼자 있소? 뒷말은 나오려는 걸 도로 넣었다. 자신도 혼자였으니 물을 것이 없었다. 조금 앞서가던 여인이 뒤로 돌았다.

  “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그러고는 공손히 모은 손과는 달리 장난스럽게 활짝 웃었다. 쿵. 홀린 듯 서 있는데 여인이 무어라 말했다.

  “에? 예? 뭐라,”

  “저 먼저 가보겠다구요. 안녕히 가세요.”

 예에······. 저만치 가버린 여인의 뒤에다 중얼거렸다. 아무래도 몽롱한 게 더위를 먹은 것 같았다. 쫓기듯 우물가로 갔다. 산은 물을 끼얹듯이 세수하고 우물에 얼굴을 집어넣었다. 아무리 눈에 힘을 주고 노려봐도 보이는 건 물에 빠진 생쥐 꼴을 한 얼빠진 놈이었다.     

 발등이 욱신거리는 것 같더니 비가 내렸다. 물론 아무도 비를 피하지 않았다. 칠석날 비를 맞으면 좋은 일이 생긴다고 했다. 예전에는 짝 없는 이들이 소원을 이루도록 바래 주는 것이었는데 견우와 직녀가 아량이 넓어졌는지 요즘은 다들 비를 반겼다. 세수한 것은 소용없게 되었지만 산에게도 비가 반가웠다. 착착하니 아까 이상한 기분이 쓸려가는 것 같았다. 갈 데 없이 배회하다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갔다. 누군가 발을 밟았다.

  “미안합니다.”

 고개를 드는 사람과 눈이 마주쳤다. 아까 그 여인이었다. 뭐라 말하려던 찰나에 누군가 여인을 데려갔다. 눈으로도 쫓질 못했다. 가는 비도 시야를 흐리는지 처음 알았다. 봤던 것 같은 모습을 떠올리려 할수록 애써 씻어 내린 생각이 되돌아와 춤을 추었다. 다음번엔 꼭 이름을 물어야지. 다음이 있을 것이라고 이유 없는 확신이 들었다.     

 한쪽에선 아저씨들이 모여 시끄러웠다. 근처 봉수대에 오늘이 축제날이니 몇 년 전부터 하던 놀이, 신경 쓰지 마쇼. 이런 짧은 말 전하러 갈 사람들을 뽑는 것이었다. 저녁을 먹고서도 사람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들뜬 분위기가 이어졌다. 오히려 점점 고조되었다. 가장 큰 놀이가 남았기 때문일 것이었다. 사람들이 여기저기서 장작을 가져와 쌓았다. 어느샌가 비는 그쳐 있었다. 여름이라서 베기도, 말리기도 힘든데 장작은 잘만 내던져졌다. 아까워서 뚫어져라 쳐다보는 중에 태가 낯익은 여인이 장작을 하나 얹었다. 산은 발을 재게 놀려 곧 그 여인을 잡을 수 있었다.

  “이봐요, 임자.”

 두어 번 부르고서야 고개가 이쪽으로 돌아왔다. 표정 없던 얼굴에 알아봤다는 가벼운 미소가 번졌다. 산은 아직도 얼굴을 확실히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 미소를 담으려고 애를 썼다. 기억하려 하면 할수록 지워지는 것 같았다. 여인에게서 눈을 떼지 않으며 산은 대뜸 물었다.

  “어떻게 불러야 합니까?”

 여인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산을 마주 보았다.

  “잘 불렀는데요, 임자라고.”

  “아니, 그······.”

  “동생은 누님이라 하더군요.”

 정말 당연하다는 듯 덧붙였다. 산은 이상하게도 이름이 무엇이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긴 말도 아닌데, 왜. 여인이 웃음을 터뜨리는데 바로 옆에서 갑자기 누군가 팔을 위로 번쩍 올렸다. 커다란 환호성이 귀를 흔들었다. 그제야 주위 소리가 들려왔다. 휘파람을 부는 이도 있었고, 대부분 박수를 치며 소리치고 있었다. 그리고 다들 장작 더미를 보고 있었다.

  “저기 이름이 뭡니까?”

 목청껏 말했지만 목소리는 여인의 귀에만 간신히 닿았다. 사실 제대로 닿은 것 같지도 않았다. 여인은 산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답했다. 저 이들이 견우와 직녀라고. 분위기가 뚝뚝 묻어나는 신나는 목소리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이번 견우가 누구냐고 했던 것을 어렴풋이 들은 것도 같았다. 사람들은 장작 더미를 보는 게 아니라 그 너머의 주인공들을 보고 있었다.

  “아, 이리 좀 빨리 와라.”

 급할 것도 없는 사람들이 견우와 직녀를 재촉했다. 물끄러미 그들을 보며 산은 놀이 규칙을 떠올렸다. 견우가 직녀를 찾는 게 맞았다. 몽둥이들이 대기하는 직녀 후보들 집을 월담해서 직녀를 가장 먼저 찾아내면 견우가 되는 것이었다. 저 사내, 보기와는 달리 맷집이 있는가 보다 했다.

 주막집 아저씨가 견우에게 기다란 횃불 막대를 쥐어주었다. 견우의 손과 엇갈려 직녀의 손이 횃불 막대를 잡았다. 그도 어렸을 적에는 견우가 되는 상상을 했었다. 지금은 매해 조금씩 바뀌는 놀이를 쳐다보기만 해도 말이다. 견우는 횃불 막대를 불에 푹 담갔다. 휘익- 붉은 호선을 그리며 횃불이 위로 올랐다. 불이 빠르게 장작더미를 후루룩 삼켰다.

 거대한 불더미가 쏟아내는 빛과 열기가 여름을 덥혔다. 방금 봉수대에 알리러 갔던 이들이 돌아왔다는 말은 귓등으로 흘리며 흘끗 옆을 보았다. 여인의 얼굴엔 붉은빛이 너울거렸다.

  “솔.”

  “예?”

  “내 이름, 솔이예요.”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갑자기 주위에서 여러 팔들이 다가와 그들을 끌어당겼다. 말을 더 잇지 못하고, 대신 사람들이 만든 크고 둥근 고리를 이었다. 땀이 옷을 적시고 흘러내릴 때까지, 함께 어울려 노래하고 춤을 추면서도 산의 눈은 솔을 찾았다. 그러다 곁을 스치며 지나게 되었을 때, 산은 빠르게 내뱉었다.

  “난 산이라고 해요.”


 직녀와 견우는 덧붙일 말 없이 행복했다. 하늘은 언제나 아름다웠다. 밝은 태양은 꺼지지 않을 기쁨이었고 구름은 온갖 아름다운 것들을 그리며 즐거워했다. 비는 달콤했다. 새들은 화락을 지저귀고 날벌레조차 춤을 추었다. 오색빛이 흐르는 은하수는 견우와 직녀가 가장 바라보기 좋아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중 옥황상제가 서신을 통해 직녀를 불러들였다. 마당에 꽃나무 정원을 더 크게 꾸미고 싶다는 청을 받아들여주신 게 틀림없으리라. 직녀는 간단히 채비하고 견우와 싱긋하며 작별했다.


  “너무하잖아요, 아버지!”

 윤 양반 댁 아가씨니 더 이상 아는 체 말라는 얘기였다. 정혼자는 아직 없는 것 같지만 혼기가 다 차는 나이니 조심하랬다. 그렇다면 아무래도 약속은 아버지 몰래 지키는 게 나을 것 같았다.


 하늘을 바라보니 별이 가득했다. 나무에 기대서서 숨을 가라앉혔다. 이렇게 신나는 분위기에 휩쓸려 보기는 오랜만이었다. 기억이 잘 나지 않을 정도로 예전이었으니 처음이라 해도 좋았다. 사람들은 어수선하고 떠들썩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솔. 문득 떠올라 눈으로 사람들 틈을 헤집었다.

  “재밌었어요.”

 솔의 목소리였다. 뒤를 보지 않아도 거기에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등이 후끈거렸다.

 산은 별이 많네요, 덤덤하게 말했으나 덤덤은 ‘무시무시하군요’를 머금고 있었다. 솔이 웃음을 터뜨렸다.

  “보통은 예쁘다고 하지 않나요.”

 산은 다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듣고 보니 예쁜 것도 같았지만 아무 말도 않았다. 어디선가 까마귀 소리가 들렸다. 칠석의 끝자락에서 할 일을 마친 녀석인가 보다 했다.

 시간은 매끄러운 침묵을 타고 달렸다. 산은 심장이 요란하다 못해 방정맞게 뛰고 있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뒤에서 기척이 났다. 가려는 건가. 입으로만 인사를 하려다가 휙 몸을 돌려 넘어지려던 솔을 붙잡았다.

  “아, 고마워요. 어두워서 나무뿌리에 걸렸나 봐요.”

 산은 솔을 놓지 않고 머뭇거렸다. 말, 말을 하자. 뭔가 쓸모 있는 말.

  “내일, 장이 열리는데 보러 나올 건가요?”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이 둥실둥실했다. 무척 좋았다.



[사진] 'fire festival'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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