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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스리스 Aug 04. 2016

ㄱ. 견우와 직녀 이야기

(2) 직녀는 사랑을 짜고- 솔산에선 데이트를

 달력 날짜를 지우는 것이 그렇게 즐거울 줄은 몰랐다. 선을 그을 때마다 한 번에 두 세 날을 건너뛰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러 담았다. 마지막엔 힘차게 검은 먹으로 푹 적셔버렸다. 손에 힘이 빠져 먹물이 튀었지만 그까짓 옷자락, 저 너머를 올려다보니 하나둘씩 검고 흰 깃털들이 보였다. 까치와 까마귀는 예상치 못한 서로의 등장에 처음엔 의아해했으나 같은 이유로 왔음을 반가워했다. 점점 늘어나는 새들은 차츰 모여 다리의 형상을 만들었다. 서로의 날갯짓에 날개를 의지한 다리는 반나절이 조금 더 넘어가서야 완성되었다. 저쪽 끝과 이쪽 끝에서부터 시작해 아직 다 이어지지도 않았는데, 마음이 급해 서두르는 모습에 보는 이들도 같이 들떴다. 찔끔찔끔 비집고 나오는 눈물은 머리가 아파서가 아니라 감동했기 때문일 것이었다.

 빨라지는 걸음에 밑이 출렁이는 것은 아랑곳 않고 끝내는 달렸다. 노랗게 얼룩져 거칠어진 옷자락들이 서로를 휘감았다. 굵다란 눈물이 후드득 내렸다.

 해가 지날 때마다 다리를 만드려 오는 새들이 점점 줄었다. 원래 습성이 날짜를 세지 않는데다, 날마다 있는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혹시라도 견우를 만나지 못하는 일이 생길까 두려워 직녀는 꾀를 내었다. 칠석날에 즐길 놀이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내릴 것이었다. 그래서 그즈음 주위에서 ‘칠석’ 소리가 자꾸 귓방망이를 때리면 새들도 알고 슬금슬금 올라올 터였다. 철커덕- 베를 짜는 직녀의 손놀림이 바빠졌다.


 산은 눈앞이 캄캄했다. 피가 거꾸로 솟는지 어지러워 구역질이 났다. 아아, 이래서는 안 되는 것이었다. 되돌릴 수만 있다면, 그럴 수 없음을 너무나 잘 알지만, 아니면, 이건 꿈일지도 몰랐다, 다시는 꾸고 싶지 않은 악몽.


 휘영청 달이 밝았다. 낼이면 날이 좋을 보름이었다. 선선한 더위에 할머니와 엄마는 마루에 앉아 낮은 목소리로 얘기를 나누고 있었다. 방금까진 궁에 간 누이 얘기였는데 지금은 성군 마마가 어떻고 하는 재미없는 얘기였다. 동이는 엉덩이가 근질거려 돌멩이를 툭툭 채 가며 마당으로 나섰다. 누이는 직녀님이 아낀다는 소문이 있었다. 얼굴은 기억나지 않았다. 그저 엄마 하는 얘기를 듣고 보면 예쁘장하고 참하게 생기지 않았을까 했다. 또 가끔 오는 편지가 걱정 투성인 것을 보면, 글쎄, 잔소리하는 엄마의 얼굴과 겹쳐지기도 했다. 누이의 생김새를 상상하는 것은 언제든 질리지 않았다. 개미를 피해가며 어슬렁거리는데 사립에 뭔가 걸려 있었다. 호랑이가 바빠서 그냥 간 건가, 하며 서운해하고 있는데 이번엔 고깃덩어리가 아니었다. 기다란 게 둘둘 말고 보니 엄마가 가끔 부잣집에서 받아오는 옷감을 닮은 것 같기도 했다.

  “엄마, 이거 저기 걸려있던데?”

 만져보기만 해도 아주 고급 천이었다. 누가 볼까 얼른 치마폭에 감추며 말했다.

  “으응, 고개 넘어 마나님이 주신 건데, 바람에 날렸나부다.”

 탐은 났으나 자세히 들여다보니 보통 있는 무늬가 아니었다. 해가 뜨자마자 관아에다 바쳐야지 했다. 그날 밤은 유난히 더워 동이도, 엄마도, 원래 잠이 없는 할머니도 뜬 눈으로 지새웠다.


 수령은 아무도 모르게 슬쩍 관자놀이를 주물렀다. 우물에서 두레박을 내리는데 이상한 소리가 들렸다는 이야기. 동네 노총각은 신단수에다 각시를 내려주십사 하고 비는데 춤을 추라는 말이 들렸단다. 춤을 췄는데도 우렁이 댕기도 구경 못했다고 불평했다. 누가 뒤에서 장난친 게 분명하다고, 혼쭐을 내달라고 했다.

  “왜, 나무줄기에 주렁주렁한 게 온통 댕기구만.”

 엄숙한 분위기가 깨지며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조사해보겠다. 다음!”

 간신히 분위기를 잡아도 말도 안 되는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누구는 갑자기 번개가 쳤다고 하고, 다른 누구는 달이 터진 것 같다고 했다. 동이 엄마는 어디서 났는지도 모르는 희한한 그림이 가득한 좋은 천을 들고 왔다. 직녀를 모시는 마을이라더니 최고급 비단도 던져주는 건가. 진상했다가는 세를 늘릴 것 같아 조용히 처리하기로 맘먹었다.

  “터졌는지는 오늘 달이 뜨는지 보면 알겠지. 다음!”

 수령은 오늘따라 유난히 사람들이 말이 많자 이를 기록하게 하고는, 모두 모아 유향소로 보냈다. 별 의미도 없을 테지만, 나이 드신 분들에게 소일거리가 될 것이었다.

 유향소에서는 받은 것들을 엮어내기 시작했다. 처음엔 시답잖아했지만, 점점 미묘한 경쟁심리가 흰머리의 열정을 부추겼다.

  “흐음, 춤을 추는 것 같은데. 춤을 춘다, 춤, 무슨 춤이지?”

  “이건 저것과 같은 그림일세.”

 놀랍게도 조금씩 그림은 이야기를 만들어갔다. 그리고 그리하여, 그 해부터 마을 사람들은 날 하나를 더 챙기게 되었다.


 그는 나무꾼이었다. 그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나무꾼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단연코 눈에 띄는 재목이었다. 도끼를 내리치는 각도는 스스로 터득할 정도로 나무꾼의 기본 덕목을 충분히 갖추고 있었다. 게다가 이름따라 어릴 적부터 산을 좋아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올라가 날밤을 아주 새고 오는 일도 허다했다. 호랑이가 나온다는 말이 떠돌았어도 봤다는 소문은 없었기에 집안 어른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기특하게 여겼지만, 일곱 여덟 살 즈음 작은 손도끼로 발등에 상처를 내고서는 그도 저도 아니게 되었다. ‘믿는 도끼 발등에 안 찍는다’가 가훈이었던 까닭이었다. 남은 흉터는 가문의 부끄럼이었지만 정작 그는 신경 쓰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여름 비가 오는 날이면 그 자리가 나 여기 있소, 하듯이 욱신거렸다.

 그는 오늘도 어김없이 산에 올랐다. 가는 길에 마주친 동네 사람이 말을 걸어왔다.

  “산, 요즘 무슨 좋은 일이 있던가? 싱글싱글하는구먼.”

  “좋은 일은요, 아저씨는 어딜 다녀와요?”

  “응, 난 저쪽 산구석에 망태버섯이 났길래 얼른 뜯어가지고 왔지.”

  “아, 그래요? 많은데 아는데, 언제든 필요하면 말씀하세요.”

  “허허, 급하면 부탁하지, 귀찮은 짓 말어.”

  “에이, 아저씨니까 해드리는 거죠. 그럼 전 갑니다!”

  “어여 가아, 응.”

 기분이 좋긴 좋았다. 좋은 일도 물론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무슨 일을 해도 그냥 흥이 났다. 지금도 날랜 발이 빨라지는 걸 억누를 수가 없었다. 솔, 귀여운 아가씨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었다. 산이 위험하다고 해도 솔은 그저 괜찮다고만 했다. 산은 망거리는 눈을 이겨낼 재간이 없었다. 마지못해 알겠다고는 했으나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었다.

 솔은 팔을 벌리고 서서 저쪽을 마주해 바람을 맞고 있었다. 어여뻐서 꼭 끌어안고 싶었지만 싶다, 는 그것으로 끝나야 했다. 그가 가만히 있자 솔은 팔을 넓게 벌린 그대로 빙글, 돌아섰다. 반사적으로 산도 자신의 팔을 옆으로 쭉 펼쳤다.

  “음?”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솔의 즐거운 재잘거림을 듣고 싶었다. 그래야 맘 놓고 오래오래 바라볼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그는 눈빛으로 묻고 말았다. 어떻게요? 솔은 그러면 그대로 알아듣고는 이제 새가 어깨에 앉았던 얘기를 서두로, 풍뎅이들 다툼을 구경한 이야기, 개미가 큰 먹이를 질질 끌고 가다 넘어진 이야기, 나비에게 손을 내밀다 갑자기 부스럭해서 놀랐는데 토끼 같았다는 얘기를 하고, 그러면서 보지는 못했지만 얼룩덜룩한 귀여운 점박이였을 것이라며 상상의 나래를 펼칠 것이었다. 개미가 넘어지는지는 모르겠어도, 산은 듣고만 있어도 좋았다. 산에 혼자 있을 때와는 다르게. 조금 더 달콤했다.

 솔을 바래다주고 돌아와 방에 털썩 드러누웠다. 아무래도 오늘 밤은 자기 그른 것 같았다. 아까 솔의 손에 스친 손이 부끄럽게 두근거렸다. 손 씻지 말까, 하는 생각에 웃음이 실실 나왔다. 웃겼다. 천장의 얼룩으로 토끼를 그리다 시선을 떼고 눈을 감았다. 솔을 처음 만났을 때, 그때는 몇 번이고 생각해도 좋았다.



[사진] '견우와 직녀'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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