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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스리스 Aug 02. 2016

ㄱ. 견우와 직녀 이야기

(1) 만남을 허락하지만 만나게 해준다고는 한 적이 없지

  “···하여, 너희는 칠월 칠석날을 제외한 모든 날에 만남을 불허한다.”

 상제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직녀가 무너지듯 휘청거렸다. 견우가 황급히 끌어안았으나, 그도 주저앉고 싶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면, 그리하시면,”

  “결정은 번복하지 않는다. 여봐라, 이들을 데려가라.”     


 약속된 날이 올 때까지 직녀가 하는 일이라곤 해가 한 바퀴 돌 때마다 짜던 베에 무늬 하나를 새기는 것이 전부였다. 더 이상 비단은 손댈 수가 없었다. 아픈 마음에서 진물이 나와 천을 얼룩 하게 물들여 버릴까 봐서. 눈을 감아도, 떠도 견우의 미소 하는 얼굴만 어른거렸다.

 철커덕-

 마지막 색실이었다. 칠석날 완성되도록 짜인 무늬였다. 작은 무늬들이 모여 휘몰아치는 큰 형상, 아름답지만 위험한 은하수를 만들어냈다. 그 생생함에 감동할 새도 없이 직녀는 대충 옷깃을 부여잡고 뛰쳐나갔다. 금세 땅이 허락하는 가장 바깥쪽까지 발을 내디뎠다. 한 발을 이쪽에 둔 것은 잘한 일이었다. 후욱, 밑으로 꺼지는 느낌에 깜짝 뒤로 물러섰다.     


 파리라곤 없었지만 소는 연신 꼬리로 철썩철썩 엉덩이를 때렸다. 방금 심심해서 밭을 다 갈고 쉬고 있었다. 견우는 소의 등허리에 앉아 어지러운 줄도 모르고 끊임없이 피리를 불었다. 끊임없이, 그 자세 그대로.

 어슴푸레하게 어둠이 물러나려는 기미를 보이자 유난히 곡조를 경쾌하게 변주하던 견우는 갑자기 피리를 한 구석에 던지듯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저 앞으로 내달았다. 서너 걸음씩은 한 번에 뛰었다. 하지만 언제나 발을 멈춰야만 했던 곳에서, 이번에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분명히 약속된 날임에도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직녀의 고운 머리채 같은 은하수도 그대로 깊고 빨랐다.     

  “상제시여!”

 하늘에 대고 울부짖었으나 무심한 텅 빈 허공은 메아리마저 삼켜버렸다.     


 시름에 싸여 앓아누웠던 직녀는 소란스러운 소리에 눈을 떴다. 적막해야 맞는 공간이었다. 혹시나 싶어 머리를 간단히 매만지고 비틀비틀 밖으로 나왔다. 밝은 빛이 눈을 적셨다. 가늘게 뜬 눈 사이로 햇살에 잠긴 붉은 철쭉이 흐드러지게 피어 있었다. 꽃송이만 한품씩 모아 둥그렇게 놓여있었다. 작은 잎들은 가려져 비죽비죽 고개를 내민 것이 잘 보이지 않았다. 아무리 어여뻐도 이전처럼 마음이 동하지 않았다. 흘끗, 시선 한 번만 던지고선 들뜨지도 않는 마음을 붙잡고 소리가 흘러나오는 우물가로 갔다. 들여다보니 잔물결 없는 수면에 사람들이 비쳐 보였다. 사람 마을이었다. 어딘가에서 직녀에게 고사를 지내는 듯했다. 한때 베 짜는 이들을 착실히 돌보던 것을, 한동안 소홀했는데, 그랬는데도 이렇게 신경 써주는 이가 있다니. 고맙기도 하고, 미안했다. 모인 이들 중 가장 나이 어린 소녀에게 말을 걸었다. 모든 소원을 다 들어주는 것은 무리였다. 

  “얘야.”

 놀란 눈치였지만 소녀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직녀님이세요?”

  “그렇단다. 아이야, 무엇을 원하느냐?”

 보통은 빤했다. 놀라운 손재주와 명성. 하지만 이번엔 왠지 다를 것 같았다.

  “직녀님, 제가 이번에 궁으로 들어가게 되었는데요, 제가 가면 어머니가 혼자 남게 되어요. 동생은 아직 어려서······. 쥐를 잘 잡는 고양이 한 마리만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그래, 큼지막한 고양이로 보내주마.”

 기분이었다. 근처 사는 호랑이에게 한두 달에 한 번 돌보라 이르면 될 것이었다. 그리고 직녀는 사실 가장 먼저 묻고 싶었으나 꾹꾹 눌러 참고 있던 말을 했다. 사랑하는 임을 만날 방도가 없다고. 소녀는 곰곰이 생각하더니 말했다.

  “은하수를 건너는 방법은, 으음, 해모수 님은 거북이를 밟았댔잖아요. 은하수는, 으음, 하늘이니까 새는 어떨까요?”

 괜찮은 생각이었다. 방법도 방법이었지만, 고마움이 앞서 몰래 소녀의 손톱 밑에 표식을 남겨주었다. 그동안엔 상심에 잠겨 아무런 생각도 할 수 없었다. 후에 소녀가 지어낸 천이 찬사를 자아내는 것은 나중 일이다.


 하늘에서도 외딴곳, 직녀가 쫓겨나 머무르는 곳은 지나다니는 새들도 드물었다. 몇 날 며칠을 기다렸으나 깃털 하나 보기 힘들었다. 절망감이 엄습해 올 때마다, 직녀는 만남을 허락만 하고 정작 길을 열어주지는 않은 상제가 다시 한 번 원망스러워졌다. 저번 칠석날 얼마나 낙담했던지.     


 바람이 기다랗게 자란 풀을 스치며 흘렀다. 참새 두어 마리가 땅을 쪼며 놀고 있었다. 견우는 머뭇머뭇 주저하며 피리를 집어 들었다. 한동안 피리가 울음에 목이 막혔었다. 지금은 가능할지 확실치 않았으나 한다면야 어쩌면 쓸모가 있을지도 몰랐다.

 필리리리- 꺽꺽거리는 바람소리 대신에 부드러운 가락이 흘러나왔다. 견우는 호기심에 다가온 참새들에게 부탁 하나만 하자, 했으나 너무 멀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대신에 몸집도 크고 영리하다는 까마귀를 소개받을 수 있었다.

  “부탁해.”

  “흠, 미안하지만, 상제께서 허락 없이 연락하는 것 도왔다간 크게 경을 칠 거라고 하셨어.”

 도대체 어디까지 손을 뻗고 있는 것인지, 견우는 그 악독함에 부르르 떨었다. 그리고 떠날 채비를 하는 까마귀를 서둘러 붙잡았다.

  “그럼 칠석날은? 그날도 안돼?”

  “되긴 하는데······. 아무래도 무리야. 무리? 아, 그래, 무리 전체가 오면 너도 건널 수 있겠는걸. 알았어 그럼 가서 얘기해줄게. 기대는 너무 마라.”

 훌쩍 날아간 까마귀가 부러웠다. 언제 되돌아올지는 몰랐으나, 견우는 한층 힘이 솟았다. 이따가는 조금 더 멀리까지 가서 소에게 풀을 뜯길 것이었다.     


  “칠석날이다. 자율 참석인데, 좀 도와주자.”

 안 그래도 눈물을 쏙 빼는 얘기였다. 얘기를 듣는 중에도 많은 새들이 이미 돕고자 하는 쪽으로 마음이 기울었다. 그리고 사실 은하수에 다리를 놓는다는 것은 실패해도 두고두고 써먹을 꽤 괜찮은 자랑거리요, 무용담이었다. 


 직녀가 새를 본 것은 근처 사는 신선이 안부를 묻고자 왔던 때였다. 거대한 학을 타고 왔었다.

  “무렴히 여쭙겠습니다. 저 학을 빌려주실 수 있으십니까.”

  “심중으로는 안겨드리고 싶으나, 저것이 알에서 깨 날 때부터 본 것이라 저 외엔 말을 듣지 않습니다.”

 익숙해진 실망감이 밀려들어왔다. 익숙해졌어도 겪을 때마다 가슴이 욱신거리는 것은 매한가지였다.

 속이 답답해 뒤뜰을 걷는데 학이 날아 다가왔다. 직녀는 아까 일로 심사가 뾰로통해 부드러운 투가 못되었다.

  “무슨 일이냐?”

  “아까는 미안하게 되었습니다. 돕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함부로 자리를 벗어날 수 도 없고, 직녀님은 절 타도 방향을 잡을 수 없을 겁니다. 그래서 제가 가깝게 지내는 까치들이 있는데, 길을 부탁해 볼까 합니다. 괜찮다면, 그네들이 다리를 만들어 줄 수도 있을 테지요.”

  “고맙다, 정말 고마워.”

 바람 한 자락이 직녀의 축 늘어진 옷깃을 팔락였다. 고운 눈꼬리 끝에 물기가 반짝반짝 비쳤다.


[사진] '은하수' 구글 이미지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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