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채로운 색의 공허
조카는 자꾸 유투브를 보여달라고 보챘다. 누나가 절대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던 것 중에 하나였다. 응 그래, 다른 거 하자, 다른 거 하자, 최선을 다해서 버텼지만 삼일은 너무 길었다. 결혼하기 전에 집을 한 번 비우려던 계획은 취소됐다. 잔뜩 채워 넣어야 한다.
"삼촌, 삼촌!"
조카가 갑자기 베란다에서 뛰쳐나왔다. 애지중지해서 기르는 화분이 아이를 붙잡는 데 실패했다.
"아니 벌써? 어디 또 마음껏 덤벼봐라 꼬마 악당아."
"아니 그게 아니라-"
"벌써 이파리를 다 무찌르다니!"
"아니 삼촌 그게 아니라고, 응!"
그제서야 나는 다시 머리를 급하게 회전시키며 쪼그려 앉았다. 눈을 마주치고 대화할 것. 나는 정말 훌륭하게 임무를 수행하는 중이었다.
"도서관 가자."
얼마나 지루했으면 첫날 시도했다 퇴짜를 맞았던 책을 찾는가 싶었는데, 그게 아니었다. 조카의 짝사랑 그녀가 도서관에 출근하는 날이 바로 목요일이었다. 부지런도 해라, 이 더운 여름에. 그래도 잘됐다 싶어 선크림을 발라주고 옷을 갈아입었다. 양산은 진짜 폼이 안 나서 조카님에게 의향을 여쭤보았다. 안 써도 된다고 쿨하게 대답해 주었다. 남는 손으로 조카 손을 잡았다. 이 정도 융통성은 있어야 완벽한 시터지.
어린이 서가는 다 키가 작았다. 어른이 책장 너머에 서 있으면 고개만 멀뚱히 튀어나왔다. 조카는 정신없이 마구 돌아다녔다. 책을 찾는 것 같기도 하고 다른 걸 찾는 것 같기도 하고. 마침 나도 찾을 게 있었다.
"ㅁ아, 삼촌 위에 있을게. 책 보고 있어."
혹시 삼촌이 늦게 와도 도서관 안에 있어, 했지만 걱정은 안 했다. 읽을래? 하면 싫다면서도 막상 책이 앞에 있으면 열심히 읽는 녀석이라- (누나가 그랬다). 게다가 그녀가 오는데 내가 있으면 괜히 어색해할지도 몰랐다. 곱게 빗은 구렛나룻을 쓱 쓰다듬었다.
필요한 책을 다 고르고 재밌는 소설이 있나 서가를 뒤적였다. 오랫동안 '대출 중'이었던 베스트셀러가 드디어 들어왔다. 이게 차례가 돌아오긴 하는구나 싶으면서도 이렇게 한참일 줄 알았다면 그냥 샀을 걸, 아쉬웠다. 습관적으로 책을 잡고 엄지로 후루룩 훑는데 가운데 무슨 색종이가 꽂혀 있었다. 이런 책도 읽다 마는 사람이 있나? 사분의 일로 곱게 찢어진 색종이의 붉은 면은 깨끗했다. 뒤집어보니 책 제목이 쓰여 있었다. 역사 칸, 조선시대에 유행했던 이야기 문화에 관한 책이었다.
"뭐야, 이거."
하필 내가 역사 전공이라, 그냥 버릴까 하다가 궁금해서 검색해보았다. 책을 뽑아 드는데 초록 색종이가 삐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이 사람은 꼬리가 얼마나 긴지 흔적을 남기고 다녔다. 자기가 읽은 책에 다 표시해 두는 건가? 정말 비효율적인 행동이었다. 도서관의 책은 자리만 지키는 것이 아니니까 말이다. 그래도 혹시 몰라서 글자만 휴대폰으로 찍고 도로 꽂아놓았다.
초록 색종이는 다시 소설로 돌아왔다. 그쯤 그만두었어야 했는데, 쓸데없이 호승심이 생겨 또 다른 색종이를 따라갔다. 검색용 컴퓨터에 자리가 없어서 색종이를 들고 기다리는데 조카가 왁, 하고 놀래켰다. 해실해실 웃는 얼굴에 옆에 양갈래로 땋은 머리 그녀가 있어서 차마 꾸짖지는 못했다. 흘끗 쳐다보는 시선을 느끼며 작게 속삭였다.
"벌써 다 봤어? 안녕, ㅁ이 친구구나?"
"안녕하세요."
"삼촌, 우리 삼촌 보러 왔어. 아직도 다 못 찾았어?"
"어, 아니. 삼촌 이것만."
갑자기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마지막 날을 시원한 도서관에서 흥미롭게 보낼 수 있는 생각. 그녀가 함께라면 조카도 꽤나 끈기 있는 모습을 보여줄지도 몰랐다. 여차저차 설명을 하고 나니 예상대로 애들이 신이 났다.
"우린 아주 조용한 탐정인 거야. 발소리도 내면 안돼."
다음 색종이는 일련번호가 쓰여 있어서 검색할 필요가 없었다. 책 찾는 법도 가르쳐주고 일석 이조였다. 사람들은 우리가 살금살금 이상한 자세로 검지를 입술에 붙이고 돌아다니는 모습을 이상하게 쳐다봤다. 하지만 아주 조용했기 때문에 아무도 뭐라고 하지 못했다.
또 다른 붉은 색종이에 적힌 책은 아무리 찾아봐도 없었다. 이 정도면 꽤 오래 왔는데 그럴 법도 했다. 이제 우리 갈까, 하려다 책장 건너편으로 누군가 들고 있는 얇은 색종이 뭉치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책장을 휙 돌아갔는데 서서 책을 훑어보고 있었다. 어린애였다. 딱 조카보다 서너 살 많은 정도. 뒤를 따라온 아이들에게 말했다.
"봐봐, 형이 책 열심히 읽잖아. 책 읽은 거 표시해 놓은 거야. 너네도 몇 년 지나면 이렇게 두꺼운 책 많이 읽어야 돼."
"헐-"
"헐-"
귀엽기는. 아주 훌륭한 교훈 타이밍이었다.
그리고 이 다독왕은 뿌듯한 표정으로 정말 비효율적인 행동을 하고 있었다.
"진짜야, 여기 형한테 한번 물어보자. 그렇죠?"
"그럼요, 저도 읽을 거라서 표시해놓고 있었어요. 오늘은 몇 개 안 남았어요."
단어 제한 영문 소설로 쓰려다가, 조금 늘려서 한글로 써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