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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별빛꿈맘 Jun 14. 2021

지금의 남편과의 동거 그리고 결혼을 하기까지

2010년 늦여름 8월의 어느 날 첫째 아이의 임신을 알게 되었다


철없이 시작한 동거

2002년 12월 11일에 처음 소개팅에서 만난 남편과

나는 자연스럽게 연애가 시작되었다

나는 서울에서 일산으로 그리고 일산에서

인천으로 직장을

옮긴 지 3년 정도 되었을 때이다

남편은 일산에서 직장을 다니다가

나보다 먼저 본가가 있는 인천으로 내려와서

그전에 했던 직업에서 다른 직종으로 직업을 바꿔서

일을 하고 있을 때이다



2006년 1월쯤 양가 부모님들께 허락을 받고

지금의 남편과의 동거가 시작되었다

그때 지금의 남편에게는 말하지 않았지

처음에 친정 부모님께서 많이 반대를 하셨다

(그때 당시만 해도 시골에서는 결혼을 하면 하는 것

이지 동거라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남자라면 집 한 채는 해와야지 라는 인식이 있었던 때였다 정말 주변에 20대에 일찍 결혼한 내 고등학교 동창 친구들을 보면 대부분 남자가 집을 혼수로 해왔다)

동거 시작할 때쯤 마땅히 살 곳을 구하지 못해서

친정부모님께서 조금 도와주셨고 그것 때문에

친정부모님께서는 처음에 남자가 집 하나도 살 능력이

안되냐며 다 그만두고 나에게 시골로 내려오라고

하시기도 했었다


지금 알고 있는 것을 그때도 알았더라면~

그때 부모님의 말씀을 들었더라면 지금의 내 인생은

조금은 달라졌을까?라는 생각을 해본 적도 많이 있다

물론 결혼을 한 다음에 가끔씩 드는 생각이었다

나는 끝까지 고집을 부리고 부모님을 설득시켰다

부모님은 허락을 해주셨고 그 후에는 지금의 남편을

너무 마음에 들어하셨다

남편의 엄마 지금의 시어머님은 그렇게 반대하거나

그렇지는 않으셨는데

그때 동거 허락받으러 갔을 때 하셨던 말씀이 아직도

생생하다 눈을 부리부리 뜨시며 무서우신 얼굴을

하시며 "둘이 같이 살든 결혼을 언제 하든 상관없는데

니들이 다 알아서들 해라"

라며 말씀하시는데 깜짝 놀랐다

(솔직히 이때 시어머님의 성격을 알아차렸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내가 미쳤다고 이 남자랑 동거를

한다고 허락을 받으러 왜 갔던 것일까 결혼하고 나서

정말 후회되는 날도 많았다 특히 가끔씩 대화하다가

욱하시는 성격을 남편이 많이 닮았다 결혼 후에 남편의

그 욱하는 성격과 나는 여러 번 대면해야 했고 많은 상처를 받기도 했다 (지금도 현재 진행형......)

사람 자존심 깎아내리는 것도

어쩜 모자가 똑같이 닮았는지 모른다  )





세상에 당연한 건 없어~~~

마땅히 살 곳을 구하지 못해서 방황했었는데

아마도 아무것도 도와줄 수 없다는 말씀도 포함된 듯싶었다 정말 시어머님은 우리 결혼할 때 나에게 쌍가락지 해주신 게 전부였다

바라지도 않았지만 그게 뭐라고 너무 서운한 감정과

아들 하나인데 너무 야박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혼하기 전 상견례에서 양가 모두 아무것도 하지 않기로 하기는 했으나

우리는 결혼 준비하면서 시어머님께 한복 해드리고

시댁 친가 어르신들께 이불 해서 가져다 드렸다

그때 시어머님도 그 정도는 해야 하는 것 아니냐 하는 그런 생각이셨는지 모르겠지만 이불 고를 때 함께 다니시며 시어머님이 맘에 드시는 이불로 골라 주셨다)


우리 결혼할 때는 금전적으로 아무 신경도 안 써주시던 시어머님은 시누이가 결혼할 때쯤 우리 부부를 당황스럽게 하셨다


우리가 결혼하던 2011년 1월이 지나고 그해 10월에 남편의 10살 아래 동생 24살 되던 시누이는 결혼을 하게 되었다



시누이는

직장을 다니고 있었는데

2011년 여름쯤에

임신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 결혼식 할 때는 그렇게 나 몰라라 하시던 시어머님은 시누이 결혼식에 "돈 100만 원은 내놔라"

이렇게 큰소리로 화를 내시며 난리도 아니었다

뜬금없이 시누이가 나한테 짜증을 내면서

소리쳐서 오빠가 한마디 했었다

그날이 시누이 결혼함 들어오는 날이어서 함 기다리고

있었는데 남편과 시어머님이

대판 말다툼을 하고 남편이 집에 가자고 해서

그냥 집으로 왔다

남편과 나는 그때 첫째 아이 태어난 지  몇 개월 안 되었을

때였고 돈에 쪼들릴 때였다 아니 당장에 큰돈이 어딨어서 돈 100만 원을 당장에 내 놓으라시는 건지

정말 당황스러웠다

그렇다고 서울 강남에서 좋은 직장 다니던

시누이가 우리 결혼할 때

조그마한 결혼 선물하나 사준적 없을뿐더러

"언니 오빠 결혼 축하해요"

라는 말 한마디 해주지를 않았다

우리는 우리 형편에 맞게 "50만 원"을 축의금으로

내놓았다

그리고 시누이에게는 들어 보지도 못한 말

결혼식날 예식장에서

"결혼 축하해요"라고 시누이에게 말해주었다

물론 지금은 시누이와 고모부가 얼마나 우리 애들을

살뜰히 잘 챙겨주시는지 모른다

나와 남편에게도 잘하시고

특히 고모부는 정말 천사이시다

고모부는 처음 뵈었을 때부터 정말 예의 바르시고

듬직하고 성실하고 너무나 착한 청년이셨다

고모네에서 지금까지 챙겨주셔서 받은

정성스러움이 너무나 많아서 늘 너무 감사한 마음이다

예전에 그 안 좋았던 경험들이 서로에게 많은 깨달음이

되어서 가족들과 부딪히며 살아가는데

많은 영양분이 되는 것 같기도 하다


시어머님도 여전히 아직도 무뚝뚝하시고 욱하는 성격이 있으시지만

그래도 잘해주시기는 한다

가끔씩 며느리와 대화하실 때 무시하는 것만 빼면......

시아버님은 아들 딸이 15세 5세 되던 해에 사고 나셔서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시어머님이 어느 때에는 너무 안되셨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또 아들 딸 혼자서

키워 내시느라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까 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그렇다

일찍 젊으신 나이에

돌아가신 시아버님을 생각할 때도

너무 마음이 아프다


특히 남편은 어린 시절 시어머님이 백일 때쯤 서울에

사시는 큰어머님 댁에 맡기셨다고 한다 그 후로 남편은

초등학교 입학할 때쯤 엄마 얼굴을 처음 보았다고

한다 어린 시절 무슨 사연이 있었겠지만 정말 그랬다는 게 어떤 때는 시어머님이 너무 했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다

사촌누나들과 사촌 형과 함께 서울 큰어머님 댁에서

돌 즈음에 찍은 사진 한 장이 집에 있다

그런 거 보면 남편도 본인 어린 시절 아기 때부터

유년시절을 키워주신 큰어머님께 잘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큰어머님께 잘 좀 해라 쫌!!

큰어머님께 잘 못하는

남편이 한심스러워서 하는 나의 하소연이다


남편은 결혼하고 나서 늘 뭔가 사소한 거에도 기분이 나쁘거나 화를 내면서 분노가 폭발하는 그런 날들이 있었다 정말 미친놈인가? 미친놈이네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남편의 내면 아이가

어린 시절 부모님께 충분히 사랑을 받지못 했던 게

이런 분노로 표현되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랬었다 요즘은 조금 덜하지만 작년까지만 해도

정말 심했었다






정신없이 바빴던 결혼 준비 어느새 결혼 11년 차

우리가 결혼할 때 인천 가까이 살고 계시는

이모님들께서 돈을 조금씩 모으셔서 결혼반지 할 때 보태 쓰라고 하시며 돈 100만 원을 봉투에 넣어서

손에 챙겨 주셨었다 얼마나 감사드렸는지 모른다

그것도 시어머님께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여태껏

말씀드리지 않았다(그런데 우연찮게 작년

모님들과 무슨 대화 하시다가 시어머님이 그 사실을

알게 되셨다고 하더라는)

그래서 상견례할 때도 양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받지 않기로는 했었지만

결혼식을 시골에서 하지 않는다고 해서

결혼식에 못 오시는 분들을 위해서

시골 결혼식장 뷔페에서 미리 피로연을 가졌었는데

우리 친정부모님은

예비사위 쓰라하시며 돈 400만 원을 몰래

겨 주셨고 결혼할 때 우리 신혼집 구할 때도

돈 3000만 원을

보태주셨다 늘 친정부모님께 죄송스러운 마음이다

몇 년 전쯤 언젠가는 갚어야 하는 돈 아닌가 라며

시어머님 들으라시며

지나가는 소리로 투정스럽게 말을 한 적이 있다

(시어머님이 어느 날인가

시누네는 결혼할 때 시댁 부모님께서 보탬해주신

큰돈을 고모부가 부모님께  다 갚으셨다는

말을 하시며 그걸 왜 갚았는지 모르겠다시며

내게 하시는 말을 듣고 나도 한마디 했었다)

뭘 그런 거를 갚느냐며 버럭 하시는데 정말 당황

스러웠었다 갚아야 하는 게 자식으로서 도리 아닌가?

지금 드는 생각이지만 결혼할 때 시댁에서 땡전 한 푼

도움받지 않은 게 너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그렇다


2006년 1월부터 2011년 1월 7일까지

기난긴 동거생활 그리고 2011년 1월 23일

결혼식 날짜가 정해졌고

2011년 1월 8일 신혼집을 구해서 이사를 했다

결혼식 전에 미리 혼인 신고를 하게 되었다

신혼집을 구하기 전까지 정말 지겹도록 이사를

많이도 다녔다 이사 다니지 않는 사람들이 너무 부러웠다 그러고 보면 직장 생활하며 기숙사 생활

했던 시절이 어쩌면 신경  일도 없고 얼마나 편리하고

그런 시간들이었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나는 결혼하기 한 달 조금 전에 다니던 미용실을

그만두게 되었다 배도 점점 불러오고 결혼식

준비하느라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시간이 후딱 지나갔는지 모르겠다

그 후로 지금까지 일을 계속 못하고 평범한

가정주부로 살아가고 있는 게 점점 더 답답하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설레임 가득 언제나 처음 만났을 때의 그 두근거리던 행복함은 어느 순간부터 조금씩 사라지고 있었다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는 것.......다시 그 설레임을 찾아가려고 노력하고있다


우리는 2002년 12월에 처음 만났고 2011년 1월에

결혼을 했으니 정말 서로에 대해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해왔지만 결혼 전과 결혼 후에 조금씩 서로 변해가는 마음과 행동들을 보면서 실망할 때도 많고

소통이 잘 안될 때도 정말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만약에 그때로 돌아간다는 것은 생각하고 싶지도

않을 뿐이다 당연히 동거도 하지 않았을 것은

정말 분명하다 그때의 나는 정말 둔할 정도로

미련스러웠다는 것이다 지금도 그런 면이 많다



 년의 연애를 지나서 동거생활을 하며 빨리 결혼을

하고 싶었지만 남편은 참 답답하게도 결혼을 하자고

쉽게 말을 하지 않았고 결혼식을 서두르게 된 계기는

계획도 없었던 첫째 아이를 임신하게 된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였다 그때서야 남편은 결혼을 하자며

말을 했었더라는 것이었다

사실 그전에 남편은 직장생활을 그만두고 3년 동안

집에서 컴퓨터 게임이나 즐기며 놀던 시기가 있기도 했다 친정 가족들에게는 창피스러워서 말을 못 했다

당장 헤어지라고 하시는 건 아닐까?라는 생각도

들기도 하고 그랬었다

시어머님께는 너무 답답한 마음에 얘기를 드렸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여러 곳에 면접을 보러 다녀도 봤지만 맘에 들지

않는다며 별 의욕이 없었는데 다행히 결혼식 올리기

10개월 전쯤 적성에 맞는 곳에 (기술직) 취업을 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묵묵히 기술을 배우며 사장님께 인정을

받기도 하고 중간에 한번 정도 회사를 옮겼고

지금 다니고 있는 회사에 정착을 하고

성실히 회사에 잘 다니고 있어서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몇 년 전쯤 어느 날인가

공장장님께서 "너 같은 놈 몇 명만 더 있었으면

좋겠다"며 웃으겠소리를 하셨다며

뭐 자기가 회사에서

인정받는다며 은근히 자랑을 하더라는...

그렇게 애가 타던 그 잃어버린 3년을 생각할 때면

정말 울화통이 터질 지경이다 어우 정말~~~

이런 내 맘을 조금이라도 아는지 몰라........






세상에 어느 누구라도 다 귀하고 소중한 존재야

내 기준에서 동거의 장단점

동거할 때의 가장 좋은 점은

매일매일 볼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신기하게도 저녁에

잠잘 때 둘이 꼭 부둥켜안고 매일 잠이

들었다는 것이다 조금 부끄러운 얘기이기는

하지만 그때는 뭐가 그리도 좋았던 건지 모르겠다

결혼 후에는 그런 습관들이 자연스럽게 사라지게 되었다

세 아이에 출산 그리고 육아에 지쳐서 나 자신조차도

기기 힘든 날들의 연속이 계속 이어졌다



동거했을 때의 단점 그중에 한 가지는

명절에 (나의 경우 시아버님 기일 포함)

시댁에 가서 명절 음식을 준비하는 것

설거지하는 것 그것이 가장 싫었다

왜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는지 그런 시어머님이

너무너무 싫었다 결혼도 하지 않았는데 단지 동거

하는 사이라면 그게 의무적인 거란 말인가???

지금의 나였다면 당연히 명절 때 그리고 시아버님

기일에 가지 않았을 것이다

남의 딸도 귀한 딸이다 더군다나 아직 결혼 전

왜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것일까 그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하면 너무 화가 난다

남편보다 10살 아래인 여동생  시누이는 단 한 번도

설거지를 하지 않았다 시키지 않는 시어머님이

얄미웠고 그때는 그런 시누이도 너무 얄밉고

꼴 보기 싫었다

그리고 봄가을이면 늘 남편과 시아버님 산소에

벌초를 다니는데(동거기간 동안 계속 그리고 결혼

해서도 포함 )

왜 우리만 벌초를 다니는 것인지 동거생활 동안에도 이해가 되지 않았었고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아니 지금은 그렇다고 해도 되지만 그때는 나도

참 미련스럽게 뭐한다고 그렇게 열심히 그러고

다닌 것인지 너무 한심스럽고 그때의 나 자신이 답답하게 느껴진다


그러면서도 늘 시아버님 산소에 벌초 다녀오는 날에는

뭔가 뿌듯하고 기분이 개운해서 잘 다녀왔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찌 보면 시어머님 입장에서는 외동아들이니

당연하다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남들은 산소 벌초 가면 가족들이 함께 간다는데

남편의 여동생도 있고 시어머님도 있는데

왜 다들 같이 안 가고 신경도 안 쓰고 아들이 당연스레

해야만 되는 줄만 알고 있는지

세상에는 당연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어느 날부터

들기 시작했다


아니 그렇다고 아들에게 딱히 해주신 게 없으시다

결혼 후에도 신혼집을 전세에 전전긍긍하며 몇 번에

이사 후에 2016년 4월 결혼 5년 만에

지금 살고 있는 집 생애최초 내 집 마련을 하게 되었다

대출 조금 받아서 들어왔지만

그래도 내 집 마련을 해서

너무나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이사했을 때 어쩐 일로 시어머님이 스탠드형 정수기

36만 원짜리를 사주셨다

우리는 여태껏 정수기 없이 보리차에 물을 끓여

마셔서 정말 필요 없다고 했는데도 기어코

시어머님이 사주셨던 것이다

결혼할 때 시어머님께 받았던 쌍가락지가 첫 번째

선물 그리고 스탠드형 정수기가 시어머님께 받은

두 번째 선물이 된 것이다

그래도 필요 없다고 했던 그 스탠드형 정수기는

지금까지 편리하게 잘 사용하고 있다

없을 때는 없는 대로 보리차 끓여먹는 게 좋았는데

정수기가 있으니 또 없다면 그게 불편하게 느껴질지도

모를 일이다 선물해주신 시어머님께 너무 감사드리는

마음이다 





2011년 1월 드디어 결혼식을 올리다

우여곡절 끝에 2011년 1월에 결혼식을 올리게 되었다

처음에 결혼식 하는 날짜를 더 앞당겨서

할 수도 있었는데

시어머님이 계속 결혼하는 달을 따지셨다

어느 달은 시어머님이 시아버님과 결혼하신 달이여서

안 된다고 하시고 나는 임신을 해서 점점 배는 불러오는데 참 답답할 노릇이었다


꽉 찬 임신 6개월이 다 되어서 결혼식을 올리고

신혼여행은 가까운 제주도로 다녀왔다

결혼식 하던 날 시골에 살고 계시는 친정부모님과

친인척분들은 고속버스를 대절하셔서 결혼식장인

인천터미널 예식장까지 올라오셨는데 이날 함박눈이

마나 펑펑 쏟아져 내렸는지 모른다

그때 창원에 살고 있던 여동생네 부부는

결혼식 하루 전날 미리 우리 집에 올라와 있었다

우리보다 2년 정도 일찍 결혼한 여동생 부부 여동생은

이때쯤 임신 7개월 때쯤이었다 

조카가 그해에 4월쯤에 태어났다

우리 첫째 아이와 생일이 3주쯤 차이가 난다

임신 7개월에 멀리서 차 타고 올라오느라 얼마나

힘들었을까 너무너무 고맙고 감사하다



우리가 결혼식 당일날 새벽 일찍

결혼식 준비를 위해서 신혼집에서 예식장으로

먼저 출발을 했었다

여동생네 부부는 결혼식 시간에 맞춰서 찬찬히 나오려고 하는데 함박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예식장까지 겨우 도착했다고 한다


결혼식 올릴 때도 상견례는 시골 친정이 있는

순천에서 하기로 했고 그 대신 결혼식은 인천에서 올리기로 하자고 시어머님이 조건을 말씀하셨다

그렇게 상견례는 자연스럽게 시골까지 내려가서

하게 되었다

인천에 살고 계시는  

남편의 둘째 큰아버지와 큰어머님

그리고 시어머님 나 그리고 남편 이렇게 다들

한차에 타고서 시골에서 맛있다는 한정식 집을

나의 셋째 남동생이 예약을 미리 해주어서 맛있는 음식도 한가득 먹고 편안히 잘 다녀올 수 있었다

날 친정아버지 친정어머니도 음식을 너무 맛있게

드셔서 정말 기분이 너무 좋았다 기어코 자기가

계산하겠다며 남동생이 모두 식사비를 계산해주었다

너무 고마운 내 동생 정말 고마워~~~ 


상견례 끝내고 산골짜기 친정집에 들러서

친정부모님께서 시어머님과 남편 큰 아버님 큰어머님께

직접 키워서 말려서 만드신  토란대를 한 포대자루에 한가득  담아서 챙겨주셨다 정말 한 포대자루였다

ㅋㅋㅋㅋㅋㅋㅋ 정말 놀라웠다

그때가 가을철 한참 토란대 말리던 시기라서

그렇게 챙겨주시고 싶으셨나 보다

봄에는 고사리 여름에는 매실 가을에는 감이랑 밤

호박 가지 고추 은행 등등

이렇게 농산물들을 한가득 챙겨서 택배로 보내

주시면 늘 시어머님 댁에 챙겨다가 드렸다~~~




(상견례 다녀오시고 나서 가끔씩 시어머님이 시누이에게 그때 상견례 때

시골 한정식 집에서 먹었던 그렇게

맛있는 한정식집은 처음이라고 제일 맛있었다며

시누이에게 말씀을 하셨다고 한다

참고로 시어머님 입맛이

정말 까다로우시다

그런 걸 남편이 똑 빼닮았다는)

상견례 다녀올 때 내려갈 때는 차가 안 막혔는데

인천에 올라올 때는 차가 너무 막혀서 조금 고생을

하기도 했었다 휴게소에는 또 사람들이 얼마나

많던지 그때가 가을 여행철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결혼할 달은 시어머님이 1월로 정하셨고

결혼할 날짜는 친정부모님께서 정해주셨다


다시 결혼식 당일로 이야기를 해보자면

하필이면 이날 눈이 너무 많이 내려서 시골에서 올라

오시는 친정가족과 친인척 분들께 너무 죄송스럽기

도 하면서 얼마나 감사드렸던 마음인지 모른다

그리고 시골 우리 동네 아랫집에 사시던 이 씨

아저씨도 나의 결혼식을 축하해주시러 올라오셨다

(국민학교 중학교 남자 동창 친구의 아버지이시다)

정말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물론 서울 경기도 가까운 곳에 살고 계시는 이모님들과,

다섯째 고모님, 셋째 고모님, 외 숭모님께도 너무나 감사드리는 마음 한가득하다

정말 감사드립니다



사실 남편과 내가 결혼 준비하려고 새벽 일찍 집에서

나오던 시간에는 이렇게 눈이 내리지 않았었다

폐백을 올리려고 옷을 갈아입으며 그곳

폐백실 탈의실에 조그맣게 있던 창문 밖으로 온통

새 하얀 눈으로 뒤덮여 있던 것이 아닌가

남편과 나는 그때서야 눈이 많이 내렸다는 사실을

알았고 결혼식에 오신 분들께서 오시는 길에

눈이 많이 내렸다고 해주시는 말씀을

듣고 미끄러운 눈길에 귀하신 발걸음을 해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하는 마음 한 가득했었다



차분히 기쁨의 결혼식을 마치고 제주도 신혼여행을

가기 위해서 인천터미널 예식장에서 김포공항까지

미끄러운 눈길을 헤치고서 가야 하는 게 걱정이었다

남편의 초등학교 동창인 00 오빠가 (결혼식 사회도 봐주셨다 너무 감사해요) 우리를 안전하게 김포공항까지 데려다주었고 비행기는 기적처럼

연착이 되지 않아서 우리 둘은 제주도까지 3박 4일의

신혼여행을 잘 다녀올 수 있었다







우리 결혼하던 날 에피소드

결혼식이 끝나고 우리 둘은 제주도로 신혼여행을 떠나고 친정부모님께서 시골에서 해오신 이바지 음식을 시어머님께 전달해주시고 시골에 내려가셨는데 아니 그 이바지 음식이 또 한가득 바리바리 정성 가득 얼마나 많이도 해서 가지고 오셨던지 남편 친가 쪽 그리고 외가 쪽에 오신 직계 가족분들께서 그 음식을 배불리 드시고 또 조금씩 나누셨다고 한다

시댁 시어머님 댁에서 일단 친가 쪽분들 모두 나눠드리고 드시고 집에 가져가시고 그러고 나서 밖에서 기다리고 있으셨던 남편 외가 쪽 이모님들 외 숭모님들께도 이바지 음식 나눠드리고 또 그날 맛있게 드시기도 하고 그러셨다고 한다

시어머님과 시 이모님들께서 해주신 얘기이다


이바지 음식도 처음에 상견례할 때 해오지 않기로 모두 의논하셔서 안 해오기로 했었던 것인데 그 음식들 어떻게 그렇게 힘들게 해 가지고 오셨는지 고생하셨을 친정부모님께 너무 죄송하기도 하고 또 감사하기도 하고 그랬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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