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우정 사이 그 어딘가

영화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

by 정주원
NlgDd9_ljAqx.jpg Billy Crystal & Mac Ryan (Harry Burns & Sally Albright)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지난 시절 그 어딘가에서 이성에 대한 감정을 느끼기 시작한 그 시점부터 내겐 이 물음이 머릿속을 떠난 적이 없었던 것 같다. 많은 여자들로부터 "넌 정말 좋은 친구야."라는 말을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인 거 같기도 하다. (28살이 된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그 대사의 이면에는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함의를 내포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보니 내 마음을 그 여자에게 고백하기 너무 창피해서, 거절당할까 봐 나 스스로 '사랑'을 '우정'으로 포장했을 수도 있다. 그 유명한 거미의 노래 '친구라도 될 걸 그랬어'처럼 말이다. 사랑과 우정, 참 같은 것 같으면서도 다르다.

<해리가 샐리를 만났을 때>는 사랑과 우정 사이 그 어딘가에 대한 해답을 가장 현실적으로 제시하고 있는 영화다. '해리 번스'와 '샐리 올브라이트'라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 사상 가장 매력적인 두 인물의 이야기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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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7년, 영화의 주인공인 해리와 샐리는 우연히 함께 차를 타고 시카고에서 뉴욕으로 향하게 된다. 뉴욕으로 가는 차 안에서 둘은 서로를 싫어하게 된다. 차를 타고 가는 중 식당에 들른 해리와 샐리. 음식 하나를 주문하는데도 이것저것 따져대며 30분 이상이 걸리는 샐리를 보며 해리는 고집스럽고 까탈스러운 여자라 생각한다. 하지만 이후 어떤 감정의 변화가 있었는지 해리는 샐리에게 매력적이라는 말을 건넨다. 여기서 문제가 시작된다. 샐리는 해리의 이 말을 추파로 이해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절친인 아만다와 사귀고 있음에도 추파를 날리는 해리를 단호히 거절한다.

일순간 머쓱해져 버린 분위기. 다시 차에 탄 해리는 샐리에게 남자와 여자는 절대 친구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 남자와 여자 사이에는 '섹스'라고 하는, 사랑에는 징검다리이자 우정에는 장애물인 그것이 있기 때문이다. 처음엔 사랑이던, 우정이던 관계없이 사람이라면 응당 매력적인 사람과 친교를 맺고 싶기 마련인데 남자가 이미 그 여자를 매력적으로 인식하기 시작했다면, 그 남자는 그녀와 하룻밤을 함께 보내고 싶어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남녀 간의 우정을 깨뜨린다. 해리의 이론은 퍽 논리적이다.

하지만 샐리는 이미 섹스 없이도 친구인 남자들이 존재한다고 해리의 이론에 반박한다. 하지만 해리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들 모두 샐리와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하는 남자들이라고 말한다. 아마 해리가 이 이론을 꺼내놓은 이유는 머쓱해져 버린 분위기를 수습하기 위함이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매력적인 여자와 친구가 될 수 없는 건 당연한 것이므로, 자기가 꺼낸 말도 놀라울 것이 없다는 얘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냥 좋게 던진 말 한마디에도 까탈스럽게 구는 샐리에게 좋은 감정을 느끼진 못했으리라.

샐리는 해리의 말에 그럼 우린 친구가 될 수 없겠다고 말한다. 샐리도 여자 친구가 있음에도 스스럼없이 샐리에게 추파를 던져대는 해리를 상종 못할 사람으로 여겼을 것이다. 여자는 남자보다 이성적이기 때문이다. 남자들은 이 순간 이 여자를 사랑하게 되면, 이 순간을 위해 모든 것을 바칠 수 있다. 그것이 지금 뿐이라 해도 말이다. 하지만 여자들은 순간적인 사랑에 반응하기보단, 시간이 만들어주는 진득하고 믿음이 동반된 사랑을 원한다. 그래서 샐리는 만에 하나 해리를 매력적으로 느꼈다 하더라도 그 신호에 반응하지 않았으리라. 결국 샐리는 해리의 말에 자의반 타의반 동의한 채 그날의 대화는 끝난다. 이렇게 둘은 서로를 싫어하게 된다.


"That's too bad. You were the only person I knew in New York."

"아쉽네요. 당신은 뉴욕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대화 마지막 샐리가 해리에게 던지는 이 대사에는 아쉬움 아닌 아쉬움이 담겨 있다.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러지 못하게 된 아쉬움, 혹은 당신 같은 사람을 미리 인간관계에서 쳐낼 수 있게 된 안도감이 섞여 있다고나 할까. 아무 일 없이 뉴욕에 도착한 해리와 샐리는 워싱턴 스퀘어 파크에서 서로에게 잘 지내라는 말만 남긴 채 헤어진다. 미리 말하자면, 이들은 5년 뒤에 다시 만나게 된다. 인연이라는 것이 참말로 얼마나 무서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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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년 뒤, 공항에서 해리와 샐리는 우연히 다시 만난다. 5년이 흐른 지금 둘에겐 모두 각자의 짝이 있다. 해리는 헬렌이라고 하는 여자와 결혼을 앞두고 있고, 샐리는 조라는 남자와 한참 달콤한 연애를 하는 중이다. 조와 함께인 샐리를 기억 못 하는 듯한 해리에게 안도하고 있던 샐리, 같은 비행기에 타고 있던 해리는 샐리를 알아보고 인사를 건넨다. 전개는 앞의 상황과 비슷하다. 스튜어디스에게 까다로운 주문을 하고 있던 찰나이기 때문이다.

공항과 비행기에서 둘의 대화는 인간관계의 허망함을 느끼게 한다. 해리에겐 애인이었고, 샐리에겐 절친한 친구였던 아만다를 둘 모두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서로에 대해 어렴풋한 기억만 가지고 대화를 이어나가는 두 사람. 아마 오랜만에 누군가를 만나는 이런 상황에 처해봤던 사람이라면 공감할 수 있는 장면 이리라 생각된다. 하지만 둘은 당시 서로에게 가졌던 감정은 또렷이 기억하고 있다. 바로 비호감.

그래서인지 해리는 호감을 가지고 있는 이성 앞에서라면 쉽게 꺼내놓을 수 없는 이야기들을 샐리에게 늘어놓는다. 조와 샐리가 한 달 정도 만난 것을 단번에 알아맞히자 어떻게 알았는지 묻는 샐리에게 해리는 상대방이 공항에 배웅 나온다는 것은 만난 지 얼마 안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해리는 아예 나중에 공항에 배웅 나오지 않아 상대방이 실망할 것에 대비해 처음부터 공항 배웅을 못하게 한다고 한다. 나중에 실망할까 봐 아예 처음부터 여자 친구를 집에 데려다주지 않는 심리처럼 말이다. 해리에 대한 비호감을 기억하고 있던 샐리는 그의 말들에 5년 전 느꼈던 것들을 다시 한번 또렷하게 느낀다. 결국 두 번째 만남에서도 둘은 서로에게 다시 한번 비호감을 안겨준다.

그럼에도 다시 한번 샐리에게 친구로서 저녁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제안하는 해리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그저 오랜만에 만난 옛사람에 대한 반가움일까. 아니면 5년 전 까탈스러운 그녀의 모습 안에서 보았던 매력적인 면에 대한 기억 때문일까. 하지만 역시나, 단호히 거절하는 샐리. 샐리와 해리는 그렇게 5년의 시간을 또 따로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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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다시 5년 뒤, 해리와 샐리는 또다시 우연히 만난다. 뉴욕의 한 책방에서. 10년의 세월은 두 사람에게 원숙함을 가져다주었다. 두 사람이 그 사이 겪은 사랑의 아픔 때문이었을 것이다. 해리는 헬렌의 외도로 이혼 수속 중이고, 샐리는 결혼을 원하지 않는 조와 이별을 겪었다. 하지만 이별을 대하는 둘의 태도는 조금은 다르다. 이별에 대해 잘한 결정이라고 이성적으로 이별을 대하는 샐리와 달리, 해리는 다른 남자와 사랑에 빠진 헬렌을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며 힘들어한다.

세 번째 만남에서 해리와 샐리의 관계는 새로운 국면을 맞는다. 절대 남자와 여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던 두 사람이 친구가 된 것이다. 둘의 비호감은 어떻게 호감으로 전환될 수 있었던 것일까. 10년의 비호감이 어떻게 우정으로 바뀌게 되었을까. 둘의 우정은 서로의 진심을 드러내면서 시작되었다. 이별 이야기를 하며 점차 가까워지더니 처음엔 서로 비호감이었다는 사실을 드러낸 것이다. 그러고 보면 미운 정도 정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다.


Harry : "What's the statute of limitations on apologies?"

Sally : "Ten years."

Harry : "Ooh. I can just get it in under the wire."


해리 : "사과의 공소 시효가 몇 년이죠?"

샐리 : "음... 10년이요."

해리 " "휴, 간신히 턱걸이했네요."


해리는 특유의 유머러스한 어투로 샐리에게 그 간의 무례에 대해 사과하고, 샐리도 그 사과를 받아들인다. 그리고 둘은 절대 불가능하다고 믿었던 남녀 사이의 우정을 이어나가고자 한다. 남녀 간의 첫인상에서 호감은 둘을 사랑으로 이끌지만, 비호감은 둘을 우정으로 이끄는 것일까.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 우정은 비호감인 두 남녀가 계속해서 우연히 마주칠 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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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가 된 해리와 샐리는 급속도로 가까워진다. 여자가 친구가 될 수 없다던 해리도 '여자 사람 친구'가 싫지는 않은 눈치다. 일반적으로 여자들에게 할 수 없는 이야기를 샐리에게는 할 수 있다는 것이 너무 좋단다. 아마 이 글을 읽는 사람들도 무슨 이야기든 서슴없이 꺼내놓을 수 있는 '이성 사람 친구'가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위에서도 얘기한 것처럼 서로에게 비호감을 가진 두 남녀의 10년에 걸친 우연한 만남은 '비호감'을 '솔직함'으로 바꾸어 놓았고, 그 '솔직함'은 '우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사실 우리 주변을 봐도 '이성 사람 친구'는 처음부터 호감을 가지고 있을 때보단 비호감일 때 더 잘 생기는 것 같다. '호감'은 '사랑'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친구인 두 사람의 에피소드 중 피자집에서 맥 라이언이 가짜 오르가슴을 보여주는 장면은 이 영화의 명장면 중 하나다. 해리가 여자들이 가끔은 남자를 위해 가짜로 오르가슴에 빠진 척 연기한다는 샐리의 말을 믿지 않자 피자집 한가운데에서 직접 메서드 연기(?)를 펼친다.

When-Harry-Met-Sally-LB2-1.jpg 친히 가짜 오르가즘을 설명하는 샐리. 그녀를 바라보고 있는 옆 테이블의 할머니가 웨이터에게 "나도 저 여자가 먹는걸로 줘요." 라고 말하는 대사는 폭소를 자아낸다.

아마 이 영화에서 둘이 가까워져 그 누구보다 친한 친구가 되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 아닐까 생각된다. 둘의 첫 번째 만남에서 샐리가 해리에게 했던 말을 기억하는가.


"That's too bad. You were the only person I knew in New York."

"아쉽네요. 당신은 뉴욕에서 내가 아는 유일한 사람이었는데."


이 말을 정면으로 반박하기라도 하듯이 해리와 샐리는 뉴욕에서 절친한 친구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렇게도 굳건했던 둘의 우정은 각자의 동성 친구인 '제스'와 '마리'로 인해 조금씩 아리송해진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힘들어하는 해리와 샐리가 서로에게 소개팅을 시켜주고자 네 사람이 함께 만난 것이다. 샐리는 해리에게 '마리'를, 해리는 샐리에게 '제스'를 소개하고자 했지만 이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오히려 '제스'와 '마리'가 서로에게 순식간에 호감을 보이며 사랑에 빠져버리고 만다. 그 후 제스와 마리는 해리와 샐리에게 각자 다른 사람을 소개하여주게 되는데 해리와 샐리는 어느 순간 다른 사람과 함께 있는 서로의 모습에 이상한 감정을 느끼게 된다. 서로의 옆에 있는 이성에게 질투를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비호감'에서 시작한 '우정'이 결국 '호감'으로 연결되고, 이것이 '사랑'으로 가게 된 것일까.

혼란스러운 둘의 감정은 각자의 옛 애인인 헬렌과 조를 우연히 마주치며 극에 달하고, 결국 둘은 하룻밤을 보낸다. 하지만 둘은 서로에게 처음으로 느낀 '호감'과 '사랑'의 감정을 이해하지 못한다. 그저 옛사람을 잊지 못해 벌어진 실수라고 여긴다. 하지만 해리와 샐리, 그리고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모두 알고 있다. 어느 순간 둘의 우정은 호감을 낳았고, 그 호감이 둘을 사랑으로 이끌고 있다는 것을. 하지만 해리와 샐리는 그것을 외면하기로 한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방황하던 해리와 샐리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생각하는 것처럼 해피 엔딩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호감을 가지고 있는 해리가 자신을 겨우 하룻밤 상대였다고 생각한다는 것에 실망한 샐리는 해리와 연락을 끊는다. 그런 샐리에게 계속해서 사과하며 연락을 해달라고 구걸하던 해리. 그 과정에서 아마 해리는 느꼈을 것이다. 아닐 거라고 그렇게도 부인해 왔던, 샐리에 대한 사랑을 말이다. 그리고 해리는 샐리가 있을 신년 파티장으로 달려간다.

12월 31일에서 1월 1일로 넘어가는 그 시간, 신년 파티에서 결국에 다시 만난 해리와 샐리가 주고받는 대화와 키스는 로맨틱 코미디 역사상 최고의 장면 중 하나가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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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rry: How about this way? I love that you get cold when it's seventy-one degrees out. I love that it takes you an hour and a half to order a sandwich. I love that you get a little crinkle above your nose when you're lookin' at me like I'm nuts. I love that after I spend the day with you, I can still smell your perfume on my clothes. And I love that you are the last person I want to talk to before I go to sleep at night. And it's not because I'm lonely. And it's not because it's New Year's Eve. I came here tonight because when you realize you want to spend the rest of your life with somebody, you want the rest of your life to start as soon as possible.


해리 : 이건 어때? 기온이 21도인데도 감기에 걸리는 당신을 사랑해. 샌드위치 하나 주문하는 데 1시간 30분이나 걸리는 당신을 사랑해. 눈썹 사이를 찡그리면서 날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는 당신을 사랑해. 당신과 만난 다음 날까지 내 옷에서 당신 향수 냄새가 나는 걸 사랑해. 잠자리에 들기 전 내가 대화를 나누고 싶은 사람은 당신이라는 사실을 사랑해. 오늘이 12월의 마지막 날이어서, 내가 외로워서 이러는 게 아니야. 오늘 밤 내가 여기온 건 내가 평생을 함께 하고 싶은 사람과 조금이라도 더 많은 시간을 함께하고 싶어서였어.


사랑과 우정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해리와 샐리의 감정의 종착역은 결국 '사랑'이었다. 결국 '여자와 남자는 친구가 될 수 없다.'라고 하는 오랜 격언은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여자와 남자가 계속 함께라는 것은 둘 사이에 '호감'이라고 하는 감정이 있다는 것이고, 이 '호감'은 필히 '사랑'으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마도 이 말에 전혀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정말 한 번도 매력을 느껴보지 못한 여자 사람 친구가 있는 사람이라면 말이다. 하지만, 사람 일은 모르는 것이다. 비호감에서 우정으로, 우정에서 호감으로, 호감에서 사랑으로 연결된 해리와 샐리처럼, 당신들의 우정도 언제 호감으로 연결되냐는 시간문제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는 내가 아는 모든 사람들에게 꼭 보라고 권해주고 싶다. (개인적으로 이 영화를 너무 감명 깊게 본 나는, 영화 포스터까지 구입하고 말았다.) 아마 로맨틱 코미디에 많이 길들여져 있는 우리에게 이 영화의 대사는 너무 구닥다리 같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영화가 89년도 영화라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또 지금까지도 몇몇 대사는 톡톡 튀고 우리의 마음을 건드린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이 영화의 진가를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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