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의 사랑 1

<나의 눈으로 본 하루의 단상 2>

by 정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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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너의 성은, 세계에서 가장 높다는 에베레스트 산보다도 높았다.

네 이름은 소은채. 네 성은 소. 진주 소씨라 했던가. 아니 그게 중요한 게 아니다. 내겐 네 성이 에베레스트 산과 같아서, 함부로 능구렁이처럼 건너뛸 수 없는 거대한 산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오늘도 난 그 산을 넘지 못한 채 널 이렇게 부른다.


"야, 소은채."


모든 성들이 너처럼 거대한 건 아니다. 동네 뒷산만큼이나 야트막한 성들도 얼마든지 있다. 나처럼 질풍노도의 2차 성징을 겪고 있는, 양쪽 다리 사이에 달고 나온 무언가가 급격히 신경쓰이기 시작한 나의 친구들이 그렇다.


"종찬아, 매점 가자."

"영권아, 윤리가 수행평가 오늘까지라 했나?"


사실 동네 뒷산을 넘듯 넘어가 볼까 생각한 적도 없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 일어날 일들을 생각하면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은채야, 야자 끝나고 집 같이 가자."

"워어어어, 은채야?? 은채야아??? 너네 무슨 사이야. 언제부터 성 떼고 이름만 부르는 사이가 된거야!"


아이들은 아마 야구장에 온듯 여기저기서 워어어어어를 늑대마냥 외쳐댈 것이고, 나와 소은채의 얼굴은 새빨개지겠지. 뭐 나는....딱히 그런 친구들의 오해가 싫은 건 아니다. 사실 꿈 속, 상상 속에서는 산악인 엄홍길 대장처럼 너의 에베레스트를 백번이고 맨몸으로 넘어다녔다. 몇 번이고 이불을 걷어차면서도, 아니 은채야라고 못 부를게 뭐야?라며 혼자 용기를 얻어, 이를 현실로 연장해볼까 생각 안 해 본 것도 아니다. 그러나 막상 꿈 속의 상황이 현실에서 그대로 펼쳐지면, 'ㅅ'의 왼쪽 비탈을 채 반도 올라가기도 전에, 난 SOS를 요청하고 만다. 조금만 그 상황에 잘못 대처해도, 너와 나는 어색해질테고...너와 친해지려고 했던 노력들은 다 물거품이 될테니까. 그런 상황이 오면 난 아마 옥상에서 뛰어내려버리고 말거야. 다시는 이 학교에 다닐 수 없을지도 몰라. 전학을 가야할텐데...그럼 엄마한테 뭐라 해야 되는거지...


"야, 윤진수. 불러놓고 멍하니 뭐하냐?"

맞다. 네게 대답하는 걸 잊었다.


"어어, 그래. 야. 이따 야자 끝나면 같이 가자."

최대한 무심하게 말해야 한다. 너와 집을 같이 못가게 되어도 내겐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으리라는 듯이. 사실 우리는 집 방향이 같기에 야자가 끝나면 암묵적으로 함께 교문을 나선다. 하지만 난 꼭 확인해야한다. 그래야 야자 때까지 마음 편히 공부를 할 수 있을테니까.


"왜?"

단답. 단답이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해야되는데 벌써 표정이 이그러지며 어찌해야 할 바 모르는 나다. 유지하자, 포커페이스.


"왜긴...왜야! 맨날 같이 가잖아."

진짜, 병신같다.


"그러게, 그런데 뭐하러 물어보냐고."

그렇다. 예리하다. 날카로운 지적이다.


"또 별걸 가지고 괜히 시비지. 그냥 물어봤다고, 참나."

뭐, 나름대로 잘 대처한 편이다. 하지만 소은채, 너와 이런 대화를 끝내고 내게 밀려드는 자괴감은. 오늘도 전학가고픈 마음을 용솟음치게 만든다.


또 한번 병신같은 대화를 한 자괴감과, 너와 오늘도 집에 함께 감이 확정되었다는 환희가 교차하며 나는 화장실에 가기 위해 복도로 나간다. 그 때, 누군가가 뒤에서 점프해 내 어깨 위로 팔을 두른다. 우리반에서 나랑 제일 친하면서, 내 앞에 놓인 에베레스트의 비밀을 공유하고 있는 유일한 사람인 영권이다.


"야, 집엔 같이 가기로 한거냐?"


"응 뭐, 괜히 확인한 거 아닌가 싶다. 이상하게 생각할 거 같은데.."


"됐어 임마. 짝사랑은 절대 오래 끄는 거 아니다. 오늘 집에가면서가 딱 기회야."


"아 근데 난 아무리 생각해도 준비가 안됬는데..."


"아 진짜 병신 티좀 내지 마셈. 뭔 준비를 해 좋다 하면 짝짜꿍 눈 맞아 사귀는 거고, 아니면..."


"아니면?"


"마는 거지!!" 영권이가 특유의 기분나쁜 헐떡대는 웃음으로 웃는다.


"아아~ 그래서 이제는 은솔이한테 말도 못걸고 계신가봐요?"

함무라비 법전의 명언이 진리로 다가오는 순간이다. 역시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짝사랑엔 짝사랑이다.


"아 이런 미친놈이, 도은솔 얘기는 하지 말라 했다 진짜."


영권이도 얼마전 '도'라는 에베레스트를 넘으려다 고꾸라졌다. 도레미파솔 중에 제일 치기 쉬운게 도가 아니냐며 자신감을 보였지만, 라와 시 뒤에 도가 또 있는 줄은 몰랐나보다.

아, 참고로 설명하고 넘어가자면 이것이 에베레스트의 상대성이다. 내게 도은솔의 '도'는 야트막한 동네 뒷산이다. 영권이에게 소은채의 '소'가 동네 뒷산인 것처럼. 이성임에도 이들의 성이 나지막한 이유는, 그냥 친구기 때문이다. 전혀 이성적인 감정이 들지 않으니까.


"아무튼, 내일부터는 은채랑 1일 하길 바란다. 맨날 침대에서 상상만 하지 말고, 닳는다 닳아."


"이 새끼가 진짜 확!"


내가 삼선 슬리퍼를 던지려는 시늉을 하자 영권이는 도망가면서 우리 반 뒷문으로 쏙 들어가 버린다.


그래. 어차피 고백의 순간이야 꿈 속, 상상 속에선 한 두번 해본 것도 아니지 않는가. 머리 속에 대사들은 다 저장되어 있다. 'ㅅ'의 오른쪽 비탈까지 넘어 너의 에베레스트를 정복하는 데 성공한 이후 펼쳐질, 너와 나의 핑크빛 나날들도 머리 속 VOD로 벌써 10억 뷰는 넘었을 거다.


아 그런데 하여간, 이런 날일수록 시간은 더럽게 안 간다.


소년의 사랑은
소은채와, 은채 사이의
'소'가 주는 좌절감이다.


-2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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