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한 걸로 해두죠.
망가진 ESTJ. 난 요즘 자주 눈물을 흘린다.
MBTI가 한창일 때, 몇 차례 검사했다. 답은 하나다. ESTJ. 요약하면 엄격한 관리자다. 실용적이다. 효율에 집중하고 책임감을 가지며, 구조화된 환경을 선호한다. 때에 따라 리더십을 발휘하며 관리를 잘하는 특징을 가진다.
단점도 여럿이다. 변화에 저항하고, 지나치게 간섭하며 통제하는 완벽주의자 같은 태도를 가진다. 가장 주요한 단점이 있는데, 바로 감정에 대한 민감성이 떨어진다. 거기다 난, T도 그냥 T가 아니라 대문자 T다. 공감보다는 현실. 공상보다는 현재를 말한다. 아니 말했다.
같이 마음 아파하기보다는 해결에 초점을 맞추고 살았다. 대학원을 거치며 강화되었다. 석사를 하며 실험을 익혔고, 박사 과정 동안 논리를 찾고 증명에 몰입했다. ESTJ는 더 진해지고, 밑줄까지 그은 진정한 ESTJ가 되었다. 가장 이해하기 어려웠다고 해야 할까? 공감을 못했던 부분이 바로 눈물이다.
운다고 해결되는 건 없다. 그 시간에 해결할 방법을 찾고, 풀 수 없는 문제라면 받아들이면 그만이라고 생각했다. 좀처럼 울지 않았다. 눈물은 하품하면 나오는 생리 작용 정도로만 여기며 살았다. "변하지 않는 진실은 모든 것이 변한다는 사실"이라는 말이 떠오른다. 변한 모양이다. 최근에 눈물이 잦다.
최유리의 숲을 들으며 눈물을 흘렸다. 유인나 유튜브 사연을 듣곤 코가 시큰거리며 눈물을 또르륵 흘렀다. 드라마에서 꿈을 찾아 떠나는 동생에게 언제든 돌아오라고 하는 언니 대사에 눈물이 주르륵 멈추지 않고 흘렀다. 숨을 깊게 들이마시곤, 마음으로 되뇌었다.
'망가진 ESTJ'
분석하는 사고는 멈추지 않았다. 날 관찰했고 질문을 던졌다. 왜? 난 왜 눈물을 흘릴까? 최유리의 숲 가사 틈에 숨어 있던 이야기가 부유하더니 마음을 뿌옇게 흐렸다. 사연 속 인물은 입시도, 공무원 시험도, 취업도 번번이 떨어진다. 이젠 그만하자는 연인에게 소리친다. 자신은 조금 늦게 피는 꽃이라며 믿어달라고 말에 마음이 진동했다. 성공을 강요하기보단, 날 진심으로 걱정하는 이가 떠올랐고, 나도 그처럼 기댈 수 있는 사람인지 의문이 교차하더니 울음이 톡하고 터졌다.
이성보단 감정이 먼저 온다. 분석보다는 마음의 울림에 집중케 된다. 상대를 온전히 이해하진 못하지만, 내가 그 처지라면이라는 말이 앞선다. 나와는 무관하던 타인의 감정이 오롯이 내게 전달되더니, 그를 조금이라도 이해했다는 표시를 눈물로 흘린 모양이다. 눈물을 한참 흘리고 나면, 안정된다. 스트레스라는 짐이 마음 한편을 묵직하게 있다가 눈물과 함께 나간다.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썩 나쁘지는 않다. 망가진 ESTJ가 아니라, 변화한 ESTJ라고 할 수 있을까? 이젠 분석하는 사고가 아니라, 누군가를 깊게 이해하려는 노력이 눈물로 보인다. 나를 한 걸음 알아간다. 정답 없는 평생 숙제인 '나는 누구인가'에 한 줄 적는다. 복잡한 날 모두 표현하기엔 16개의 분류가 너무 작았던 모양이다.
흘린다. 흘려보낸다. 물을 따라간 그곳에는 다른 누군가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마음을 열고 눈물을 저항 없이 흘려본다.
표지: 최유리 숲 앨범 자켓가진 ESTJ. 난 요즘 자주 눈물을 흘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