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강박으로 만든 각성제가 쉬지 않고 뛰게 했다.
"책과 글쓰기에 매몰되어 있지 않으신가요?"
글을 쓰기 시작한 건 2022년 7월이다. 매일 글을 썼다. 브런치 스토리에 일주일에 7편을 발행했다. 글감을 섬세하게 채굴했고, 잊을까 계속 메모했다. 시간이 흘러 무대도 내용도 확장했다. 과학 이야기는 네이버 프리미엄 콘텐츠로 옮겨 매주 한 편씩 쓰고, 책 이야기는 인스타그램으로 옮겨 매주 3편씩 발행하고 있다. 브런치 스토리에는 일주일에 3편 발행하고 있다. 난 여전히 일주일에 7편을 쓰고 있다. 활동을 더했다. 독서모임은 팟캐스트로, 가끔 릴스와 유튜브를 만들고 있으니, 처음 시작한 매일 글쓰기에 여럿 활동을 하고 있다. 최근에는 브런치 스토리 글을 길게 쓰려 노력하고 있다. 글자숫자로 따져보면 더 많은 글자를 찍어내고 있다. 메타인지를 발휘해 한 발 떨어져 보면, 난 '글 공장'을 운영하는 공장장처럼 보인다. 착착 일정에 맞춰 글을 찍어낸다. 걸작에 가까운 글을 언감생심이고, 일정을 어기지 않고 불량품을 최소화하며 제시간에 납품하는 엄격한 공장장. 물론, 회사도 착실하게 다니고 있다. 최근 비슷한 말을 몇 번 들었다. 요약하면, '언제 책을 읽고 글을 쓰며 발행하냐'라는 질문이다. 그럼, 무심하게 이야기한다. "아침에 책 읽고, 주말에 시간 나면 몰아 쓰고, 그래도 채우지 못한 글은 퇴근하고 쓰고, 점심에 나눠 쓰고 읽어요." 자연스레 돌아오는 질문이 하나 더 있다. "언제 쉬세요?" 틈틈이라는 말과 함께 웃음으로 넘어간다. 글을 쓰기 시작한 초창기부터 나를 봐준 브런치 글벗께서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셨다. "책과 글쓰기에 매몰되어 있지 않으신가요? 출근도 하실 텐데 도대체 언제 어느 시간에 이걸 다하시는지..." 사실 쉬는 건 늘 미룬다. 주변에서 비슷한 이야기가 나오니 돌아보게 된다.
글은 왜 쓰기 시작했을까? "그저 필요한 것은 마음을 산란시키지 않을 차분한 공간뿐이었다." (<귀하의 노고에 감사드립니다>, page 313) 공간이 눈에 보이는 실체에만 한정 짓지 않는 다면, 내게 마음을 차분하게 하는 공간은 다른 곳이 아닌 바로 글을 쓸 수 있는 빈 화면과 타탁타탁 생각을 물성으로 바꿔주는 펜일 수도 있고, 컴퓨터 커서이기도 하다. 여기서는 자유롭다. 생각만으로 사람을 만들어 내고, 장소를 창조할 수 있다. '문을 열면 사람 흔적 하나 없는 사막이 바람을 후하고 불어 따가운 열풍이 훅 끼친다.'라는 문장으로 난 사막 한가운데로 빨려 들어간다. 때로는 흩어지고 있는 일상을, 휘발되기 쉬운 감정을 기록할 수도 있다. 어디에 있든 글을 쓰기 시작하면, 그곳은 고요한 공간이 된다. 책도 마찬가지다. 귀를 닫고 활자로 빠져든다. 작가가 창조한 세계는 가상이 아니라 현실이 되는 소설. 글쓴이가 살아가고, 살아내고, 살려고 했던 기록을 담담하게 그린 에세이. 생각지도 못한 시선을 던지는 인문학. 세상을 조망할 기회를 주는 과학 책까지. 글쓰기로도 마음이 산란하면 책으로 빠지면 된다. 책과 글쓰기는 내게 소중한 공간이다. 다른 이유도 있다. "나는 성재를 안은 팔에 힘을 꽉 주며 생각했다. 바깥에서 어떤 고통과 수모를 겪든 나는 견딜 수 있다. 그 후에 성재가 기다리는 이 집으로 돌아올 수만 있다면. 나는 언제든 성재를 만날 수 있고 성재와 맛있는 음식을 먹고 함께 몸을 씻은 뒤 잠을 청할 수 있다." (<비눗방울 퐁>, page 99). 우린 종종 수모를 겪게 된다. 대상도 여럿이다. 직장 상사가 툭 던진 말, 의도를 가진 각진 단어로 말하는 동료, 따가운 말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친구, 잘 알아서 더 아프게 찌르는 가족. 당하고 잊으면 좋지만 어렵다. 말을 하는 이도, 말도 다 사라지고 없지만 기억과 생생한 감정이 함께 쿡 하고 박힌다. '생각하지 말자'라는 말로 더 깊게 찔러 들어와 자주 생각하게 되는 악순환에 들어가면 끝이 없다. 그때, 내게는 글쓰기가 집처럼 느껴진다. 아프게 한 이들이 한 말을 잊어버리고, 언제가 빈 화면으로 나를 기다리는 자리에서 풀 수 있다. 아무도 보여 줄 수 없는 일기에 휘갈겨 쓰기도 하고, 납득할만한 이유까지는 아니더라도 이해를 위한 글을 쓰기도 한다. 아픈 하루를 보내더라도 글쓰기와 독서로 와서 난 쉴 수 있게 된다. 그런데, 과정 전체가 곁에 있는 이들에게 걱정을 끼칠 정도로 변하고 있는 모양이다. 소란은 지아가 변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변하는 건 당연하지. 사람은 누구나 변하고 게다가 우리는 계속 자라는 중이니까. 나도 변하고 있겠지. 그런데 지금 지아는 자연스러운 방향과 속도로 변하고 있는 걸까? (<귤의 맛>, page 61). 자연스러운 방향과 속도일까? 차에 타고 있을 때는 모르지만, 옆에서 보는 이들에게는 위태롭게 빠른 속도로 가고 있는 차처럼 보이는 건 아닐까? "불안과 강박으로 만든 각성제가 쉬지 않고 뛰게 했다" (<도대체 책방이 뭐라고>, page 149)라는 말이 떠올랐다. 글을 쓰는 일도, 책을 읽는 일도, 불안과 강박에서 벗어나 도피처가 되어 뛰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현실이 힘들수록 더 빠르고 깊게 뛰어가고 있었던 모양이다. 시간 틈이 조금만 나면, 거기에 난 휴식을 집어넣지 못하고 그저, 활동으로 가득 채워 넣었다. 그래야 불안이 사그라들고, 무언가 했다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하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것도 과하면 좋지 않다. 물을 먹으면 좋지만, 물은 너무 많이 먹으면 전해질 균형이 무너지니 오히려 독이 되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운동도 분별없이 하다 보면 관절, 근육이 다쳐 다시 운동하기 어려운 지경에 가기도 한다. 인간은 완전하지 못하기에 실수를 밥 먹듯한다. 아무리 옆에서 이야기해 주어도 체험하기 전까지는 모르며 산다. 굳이 깨지고 넘어져야 깊게 깨닫게 된다. "살아 있음이 실패처럼 여겨지던 과거의 시간들이 전과는 다른 것으로 보였다. 오히려 그 좌절들이 쌓여 지금의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왔다는 사실이 선명해졌다." (<친애하는 나의 종말>, page 252) 그럼에도 지금의 여기까지 오게 한 건, 숱한 실패가 경험이 쌓였고, 좌절을 디디고 온 덕분이라 생각한다. 빠르게 달리고 있는 내게 '워워'라는 소리를 되뇌어 본다. 날 오래 보신 작가님이 하신 말을 잘 보이는 곳에 두고 본다.
"어차피 계속 읽고 쓸 텐데 적당히 달립시다."
*글 발행을 줄일 수는 없지만, 휴식을 강제로 끼워 넣어보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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