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여행으로 3개월은 살 수 있어."
"이번 여행으로 3개월은 살 수 있어."
깡촌캉스!
연결된 휴일을 맞이해 여행을 가기로 했다. 여행에 테마가 빠지면 섭섭하다. 시골로 떠나는 여행. 그냥 시골도 아닌 깡촌. 그냥 촌캉스 아니고 깡촌캉스. 여자친구 아버님이 계시는 고향 마을이다. 사는 곳에서부터 4시간이 떨어진 먼 곳이다. 비슷한 하루에 쉼표가 되기도 하고, 느낌표가 되는 여행인지라 설렜다. 거기다 누구와 함께 가느냐가 중요했다. 여자친구, 여자친구 어머니, 그리고 여자친구의 친구들. 기대가 더해진다. 즐거운 마음과는 반대로 일정은 거칠었다. 휴일이 연달아 있으니 다른 이들도 비슷한 생각을 하며 놀러 갈 거라 예상했기에 일찍 떠나기로 했다. 새벽 5시에 출발한다. 결연한 의지를 가지고 잠에 들었다.. 싶었는데 4시다. 정신을 차리려 시원한 물에 샤워를 했지만, 영혼과 몸이 여전히 떨어져 있는 상태였다. 어둑함이 조금씩 멀어져 가는 새벽. 필요한 물건을 트렁크에 가득 싣고는 떠났다. 깡촌캉스 시작!
빈곤함 감정에 이벤트 더하기.
인간은 간사하다. 평온한 하루를 보내면, 감사한 마음보다는 지루함을 느낀다. 고난이 다가오면 얼굴을 바꾸며 편안한 하루를 돌려달라고 떼쓴다 -'이래서 검은 머리 짐승은 거두...'- 간사함을 간파하고, 만들어진 기구가 있다. 롤러코스터. 안전한 상태에서 극단적인 체험을 즐긴다. 안전하지만, 지루함을 날리는 롤러코스터가 그 틈을 비집고 들어간 기구가 아닐까 한다. 또 다른 방법이 바로 여행이다. 평온한 하루를 깨고 안전하게 떠나 평소에 만날 수 없는 상황에 빠지고, 불편함을 감수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쉼이 목적이라면 고가의 호텔에서 지내는 게 맞지만, 우린 시골로 몇 시간씩 운전을 하며 떠난다. 알 수 없는 긴장감으로 하루를 팽팽하게 하려는 건 아닐까? 옅은 즐거움, 잦은 화, 종종 찾아오는 슬픔, 간혹 스며드는 기쁨이 감정을 가난하게 할 때, 여행만큼 격정적으로 풍요롭게 하는 이벤트도 드물 테다. 졸음을 참다 운전을 교대했다. 떠오르는 햇살을 보다 까무룩 잠에 들었다 깼다. 도착한 곳은 목적지가 아니었다.
기분 좋은 이탈.
순천 송광사. 붐비지 않은 주차장에 정차하고 나서야 일어났다. 누가 쫓아오는 것도 아니고, 거의 다 왔으니 들렀다 가자는 일행에 기분 좋은 기지개를 켰다. 가는 길에 있는 산딸나무를 보며 여름이 왔음을 느끼며 걸었다. 흐르는 물소리마저 들리는 고요한 사찰로 향하니, 반갑다면 시원한 바람이 등을 밀어내는 착각까지 든다. 어머니를 따라가던 가락에 맞춰 대웅보전으로 향했다. 기도를 하시는 분들 틈을 조심스레 피해 절을 드린다. 한 분에 3번씩 9번. 끝나고 나오려니 일행이 차례차례 올라와 내게 속 사귄다. "몇 번 하면 되는 거야?" 아홉 번을 하면 된다고 이르고는 먼저 나와 마당을 거닐었다. 계획이 조금만 틀어져도 동동거리던 내게 기분 좋은 이탈을 알린다. 벗어난 길에서 만난 곳에는 휴식이 있고, 새로운 만남을 기대하게 만든다. 구석구석을 둘러보고 있으니 출출하다. 이제는 내려가야 할 시간인가 보다. 왔던 길을 되짚어가며 놓쳤던 꽃도, 싱그러운 나무도 둘러본다. 올라왔을 때와 다르게 사람들 와글거리는 소리가 요란하다. 넓었던 주차장에는 차들이 빼곡하게 들어찼다. 일찍 움직인 보람을 느낀다. 목적지로 향했다.
"어떻게 올 생각을 다 했어?"
아래가 잘 보이는 언덕에 익숙한 모습이 보였다. 요란한 소리를 내며 올라가니, 아버님이 반갑게 맞아주신다. 장갑은 벗고 손을 탁탁 터시며 악수를 청하신다. "어떻게 올 생각을 다 했어?" 흐뭇한 웃음이 더해지니, '와줘서 고맙다'로 해석되었다. "당연히 와야죠"를 외치며 손을 잡았다. 차례대로 인사를 하고 차에 올라타려고 하니, 손짓하신다. "멘토 분들이셔, 인사해야지." 얕은 담을 경계로 함께 사는 주민에게 고개를 푹 숙여 인사를 한다. 고향이라고 하지만, 오랜만에 돌아온 그곳에서 낯선 일이 많으셨나보다. 사람이 홀로 살 수 없다는 걸 시골에서 절절하게 다시 느낀다. 멘토라고 할 만큼 든든한 기둥이 되주신 분에게 간단히 자기 소개를 했다. 마치, 아이를 선생님에게 맡기는 부모님처럼. 깡촌캉스의 주요 무대로 진입했다. 세월의 흔적은 가득하지만 깔끔한 집. 마루에 우리 집을 차곡차곡 쌓았다. 모든 준비가 되어있다는 듯, 우리가 말하기도 전에 필요한 일들을 일러주신다. 충전기에 자리를 잡은 휴대전화처럼 턱 하니 마루에 앉았다. 발끝부터 충전이 시작된다.
시골은 절기에 따라 움직인다.
달력 아래에 깨알같이 쓰여있는 절기. 자연과 분리된 도시에 사는 탓에 절기와 멀어졌기에 잘 모른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낸 빛, 온도에 갇혀 일한다. 쾌적하게 일할 수 있는 환경이 외부와의 단절로 이어졌다. 날짜를 보니 우리가 간 날은 <망종>이었다. "수염(까끄라기) 있는 종자"라는 뜻으로 모내기를 하는 절기라고 한다. 시골에서는 절기에 따라 행동양식이 정해진다. 내일 모내기를 하신다는 아버님. '도와드려야 하나'라는 생각을 읽기라고 하신 듯, 오늘내일 일정에 따라 재미있게 놀라고 하시며, 쾌활하게 말씀하신다. "점심 먹자! 오늘은 마당에서 먹자." 여행의 절반은 먹는 게 아닐까? 고소하게 구워진 삼겹살, 방금 밭에서 추려오신 상추, 아직 자라고 있지만 자라는 우리는 위해 꺾어오신 작은 깻잎까지. 허겁지겁 '맛있다'만을 외치며 먹었다. 에너지를 충전했으니 이젠 움직일 때다.
- 적다 보니, 길어졌습니다. 소중한 것을 덜어내는 일이 글 쓰는 일이라고 하던 말이 떠올랐지만, 귀한 이야기에 틈틈이 떠오르는 탓에.. 다음 화에 이어서 써보겠습니다!
- 최근 글 쓰는 주기가 줄었습니다. 잠시 천천히 쓰라고 몸도 마음도 신호를 보냅니다. 곧 돌아오겠습니다.
*메인 사진은 송광사 대웅보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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