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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서향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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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Starry Garden Sep 01. 2023

빌런 등장!

그분의 신발을 신어 볼까요?

빌런 등장!


  여자 친구 생일 쿠폰 덕분에 평일 저녁에 저렴하게 영화를 봤다. 킬링타임용으로 적합한 영화라 보고 나서는 감상을 나누며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큰 전화소리가 통로를 따라 내게로 덮쳤다. 화끈한 목소리에 주목했다. 나뿐만 아니라, 영화를 보고 나온 사람들이 모두 그분(?)에게 눈을 돌렸다.


  그분은 화려한 등산복과 선글라스를 끼고는 전화를 하고 계셨다(참고로 저녁 10시였고, 여긴 실내였다). 다른 사람의 대화를 엿듣는 건 예의가 아니지만, 그녀의 목소리는 내 귀를 때렸다.


  영화를 사천 원에 볼 수 있는 쿠폰인 줄 알고 왔더니, 사천 원을 할인해 주었다고 한다(10분간 지속된 이야기는 한 줄로 요약된다). 사천 원으로 영화를 보여주지 않는 직원 욕부터 해서, 융통성 없는 대기업의 횡포로 이어지더니, 국가가 오직 세금만 걷어가고 자신에게 피해만 준다는 이야기에 머문다. 그분은 같은 말이지만, 여러 문장과 단어로 반복하며 말씀을 이어가신다. 마침 엘리베이터가 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혀도 통화를 끝나지 않았다. 이번에는 웃음소리까지 탑재되어 좁은 엘리베이터를 가득 채웠다. 헛웃음이 나왔다.


  '아 이 분 빌런이구나!'


  겨우 일 층에 도착했다. 문이 닫히자 웃음이 나왔다. 


  "와 저런 분이 아직도 계시네."




  빌런 (villain). 셜록 홈스에게는 모리어티 교수가, 베트맨에는 조커가 있다. 그분의 반대편에 서 있는 주인공인 히어로는 어디에 있을까? 조커는 배트맨을 보며 "넌 날 완성시켜 (You complete me.)"라고 했으니, 그분의 반대편에 서있는 히어로는 있어야 하지만, 그 자리에는 없었다. 빌런이 벌인 짓을 수습하는 히어로가 없는 그분은 마음껏 공공질서를 부수며 공적인 공간을 사적으로 썼다. 


  빌런을 검색하니, 단어의 뿌리가 감자처럼 후드득 따라왔다. 오래된 프랑스어인 vilein이 지금 우리가 쓰는 빌런과 발음이 비슷하니, 뜻을 공유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그럼 vilein은 무슨 뜻일까? 이 단어는 역사가 깊다. 고대 로마의 대농장인 villa에서 일하는 일꾼인 villanus에서 유래되었다고 했다. 여기서 나온 단어가 하나 더 있는데, 바로 village (마을)이다. 


  이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까? 뙤약빛 아래에서 일하며 밀을 재배하고 포도를 키웠을 테다. 몸에는 흙이 잔뜩 묻어 있고, 변변한 비료가 없으니, 동물의 배설물을 모아 주니 냄새로 만만치 않았다. 이들은 모양과 이름은 바뀌지만 국가, 도시, 마을에 먹을거리를 제공하며 튼튼한 기둥이 되었으리라. 귀하게 여겨줬을까? 당연히 있어야 하는 존재이자, 나를 위해 존재한다고 생각했을 테다.


  시대는 지나고, 산업화가 일어나니, 도시가 생겼다. 농장 주인뿐만 아니라 이제는 도시에 사는 사람까지 이들을 무시하지 않았을까? 거기다, 자연 변화에 직접 영향을 받는 이들이 흉작이라도 들면 돌변했을 테다. 거두어 가는 사람은 그대로 있지만, 그들 손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들의 시작은 악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변했고, 단어가 탄생했으니 빌런이 아니었을까?


  빌런이라는 뜻을 되짚어 읽고 있으니, 마음 한 구석에 나를 관찰한 결과표가 인쇄되어 나온다. 그분도 혹시 악의가 아니라 내가 짚어내지 못한 이유가 있었기 때문은 아닐까?,라는 글이 적혀있다. 그분도 내가 알지 못한 이유로 악의가 아니라 생존을 위해 변화한 빌런이 아닐까? 


  영어 관용어구 중에는 "To put yourself in someone`s shoes"라는 말이 있다. 바로 해석하면 '누군가의 신발을 신다.' 정도가 된다. 한발 들어간 뜻을 보면 '다른 사람의 입장이 되어보다.'라고 할 수 있겠다. 그분의 신발을 신어볼까? 불편한 일이긴 하지만, 이미 지나간 일이니 내겐 이해하고 배워야 할 일만 남았다.  


  지하주차장에서 차를 돌려 나오니, 날이 어두워졌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를 기대리니, 아까 화려한 등산복 빌런이 공유 자전거를 끌고 정확한 신호에 횡단보도를 건너신다. 이번에는 공공질서를 지키고 걸어가신다. 그분의 신발을 신었지만, 아직은 잘 모르겠다. 불쑥 무서운 문장이 하나 떠올랐다. 


  '아! 나도 어디에서 빌런일까..?'


빌런등장!

덧붙임 

  밤에도 선글라스를 쓰고 자전거를 타시더라고요. 혹시 건강 때문이셨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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