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먼저 일을 찾아본다. 곳곳에 어머니 시간이 있다.
나는 어머니 시간을 갉아먹고 자랐습니다.
시간을 귀하게 여긴다. 강박에 가깝다. 시간 틈을 용서치 않고 무언가를 해댄다. 큰 시간이 남으면 글쓰기를 하고, 그보다 작으면 책을 읽고 그보다 작으면, 산책이라도 나간다. 시간이 나를 키우는 유일한 도구라 생각하는 탓이다. 생각을 수식으로 상징화해봤다(예전에 쓴 글에 기초해 정리했다 <능력이란 무엇일까?>).
능력 (A) = 이성 (r) X 경험 (e(t))
능력은 이성과 경험의 곱이라 생각한다. 우선 이성. 이성은 논리적 사고라 생각한다. 이를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논리적인 책과 글을 읽어야 한다. 시간이 필요하다. 다음은 경험. 경험의 밀도는 사람마다, 사건마다 다르지만, 결국 시간이라는 종속 변수 아래에 있다. 나를 지키기 위해서는 능력이 필요하다 믿는 나로서는 시간이 무엇보다 소중하다. 무섭지만, 언제라도 끝날 수 있다.
시간 계획을 촘촘히 세워둔다. 세상에 계획대로 되는 일이 어디 있으랴. 아무리 준비하더라도, 계획이 무너지기는 일쑤다. 종종 돌발적인 일이 나타나 세워둔 계획을 쓰러트리고 만다. 특히 집안일이 그렇다. 강박은 쉽게 짜증으로 변한다. 구체적으로 집안일을 살펴볼까?
사람은 일만 하며 살 수 없다. 집을 건사해야 한다. 청소, 요리, 빨래.. 거기에 주렁주렁 걸려있는 다른 일도 많다. 청소 도구를 사두어야 하고, 세재를 채워 넣어야 한다. 요리를 위해 장을 봐야 하고, 상하기 전에 재료를 써야 하며, 설거지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 세탁방법에 따라 빨랫감을 분류하고, 말리며, 빨래를 개켜야 한다. 모든 게 시간이다. 모든 게 시간이다. 최근에 1인 가구가 늘어남에 따라 위탁할 수 있는 방법이 여럿이다. 시간을 돈을 주고 사는 일일테다. 한계가 있다. 모두 위탁할 수는 없다.
최근까지 어머니의 시간을 나눠 받았다. 아니, 정확히는 빼앗고 살았다. 기억을 더듬어 보니, 오랜 시간 동안 그랬다. 고등학교 때까지 가족과 함께 살았고, 대학 때부터 박사까지는 혼자 살았다. 그러다 최근 몇 년, 함께 살고 있다. 학창 시절은 공부한다는 핑계로 어머니 시간을 갉아먹으며 공부를 했다. 최근 절반은 직장을 다닌다는 핑계로 어머니 시간을 긁어먹었다.
가끔 빨래를 널고, 가끔 설거지를 했고, 가끔 화장실 청소를 했다. 하지만, 난 대부분 어머니의 시간을 훔쳐 살았다. 초중고를 다닐 때는 몰랐고, 회사를 다닐 때는 알면서 모른 척했다. 죄송했다. 어머니에게도 귀한 시간을 먹고 자라났기 때문이다. 이젠 먼저 하려 한다. 화장실 청소를 미리 하고, 요리를 대신한다. 먹은 것에 비하면 사소하기 짝이 없지만.
여전히 난 급작스러운 집안일에는 짜증이 불쑥 올라온다. 그럼 미안한 마음만 커진다. 갉아먹고 있는 주제에 짜증까지. 지금 내가 깨끗한 날들 보내고 있다면, 누군가의 시간이 소비된 탓이리라. 짧지만, 어머니의 시간을 체험하면 알게 된다. 해도 티도 안 나고, 안 하면 티가 나는 일. 어머니에게도 돌아오지 않는 시간.
내 삶이 쾌적하다면, 누군가 돌아오지 않는 시간을 갉아먹고 있는 증명이리라. 나눠 주시는 분이 누구인지. 아는 것만으로 그치면 안 된다. 내 시간도 내어야 한다. 무임승차는 안 된다. 내 시간만큼 그분의 시간도 귀하다.
시간은 무척 한정된 자원이다. 흘러가면, 끝이다. 무섭지만 곧 끝날 수 있다. 내가 아무리 강박으로 묶어낸다고 하더라도, 쉬이 무너진다. 아무리 내가 준비한다고 하더라도, 계획은 무너진다. 그러니, 이제는 나에게 기꺼이 시간을 내어주는 분들을 봐야 한다. 내 시간만큼, 아니 더 귀한 시간을 내어 주고 계시는 분들을 기억하며, 내 시간을 낸다.
오늘은 먼저 할 일을 찾아본다. 곳곳에 어머니의 시간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