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아이에게 자유를 주는 날.
마음 한 편에 숨어 있는 아이를 불러내는 크리스마스 캐럴.
크리스마스를 기다린다. 몇 년 전만 해도 냉소적인 마음을 가진 나는 빨간 날, 쉬는 날 정도로 여겼다. 참 변했다. 일등공신은 여자친구다. 설레는 마음으로 이번 크리스마스에는 무엇을 할까 고민을 하고 있다 보면, 에너지 보존의 법칙이 떠오른다. 내가 그녀의 에너지를 많이 빼내어 온 모양이다. 난 그녀보다 더 크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다.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캐럴을 튼다. 짤랑짤랑하는 징글벨도 반짝반짝거리는 음도 크리스마스가 왔다고 알린다. 크리스마스에 태어나신 분을 찬양하기 위한 곡이라는 생각은 잊고 흥얼거린다. <Walking in a winter wonderland>, <Let it snow>, <Last Christmas>.. 제목은 낯설지만, 첫 음을 듣자마자 알게 되는 캐럴이 좋다.
왜 좋을까? 캐럴을 검색해 보면 "크리스마스에 부르는 성탄 축하곡", "크리스마스에 예수 그리스도를 찬양하기 위한 노래."라 한다. 종교인도 아닌 내가 좋아하는 이유가 여기에는 없었다. 나만의 답이 보이지 않을 때, 내가 하는 방법이 있다. 딴짓하기. 무의식 어디에 서있는 내가 풀어내길 기다리는 방법이다.
고민을 서랍 제목으로 적어둔지 사흘이 지났다. 마음 잊고 있던 아이가 쪼르륵 나왔다.
우리 마음에는 아이가 산다. 나이와 상관없다. 있다. 다만,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잘 보이지 않는 마음 구석으로 내몰고, '어른은 어른답게'라며 아이가 뛰어놀지 못하게 한다. 시작은 언제일까? 모르겠다. 아이가 숨었을 때, 철들었다는 이야기가 흐릿하게 남아있을 뿐이다.
아이가 나와 뛰어노는 게 문제가 될까? 영국 철학자인 존 스튜어트 밀이 하신 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자신의 기호를 즐기고 자기가 희망하는 것을 추구할 자유를 지녀야 한다. 각각의 개성에 맞게 자기 삶을 설계하고 자기 좋은 대로 살아갈 자유를 누려야 한다. 이러한 일이 남에게 해를 주지 않는 한, 설령 다른 사람의 눈에 어리석거나 잘못되거나 또는 틀린 것으로 보일지라도 그런 이유를 내세워 간섭해서는 안 된다." (존 스튜어트 밀 자유론, page 37)
마음속 아이가 언제든 뛰어놀아도 되지 않을까? 천진함을 마음껏 펼치고, 신나게 말이다. 해를 주지 않는다면 무슨 문제가 될까? 자유다. 아이에게 자유를 주는 일. 나이와 상관없이, 내 마음속에 있는 아이에게 기회를 주는 일. 어른이 무엇인데, 내 마음의 아이를 옥죌 수 있을까?
아이처럼 크리스마스를 누리고, 산타클로스를 기다리는 어른. 이상한가? 다시 존 스튜어트 밀의 말로 돌아간다. 다른 사람의 눈에 어리 석어 보여도, 틀린 것처럼 보일 지라도 뭐 어떤가? 그들에게 피해만 주지 않는다면, 마음속 아이에게 노는 터전을 내어 주는 일이 말이다. 난 자타가 공인하는 어른이 되었다. 나이를 먹었다는 이유로 진중한 척하는 일도 잦다. 그래서 내 마음속 아이는 깊게 숨어 들어간 모양이다.
캐럴이 좋은 이유가 보였다. 일 년 내내 나오지 못하게 하던 아이를 뛰어나오도록 기회를 주기 때문이었다. 크리스마스라는 핑계로 노래를 흥얼거리고, 크리스마스 뒤에 숨어 눈이 올 때 강아지처럼 뛰어다니고, 눈사람을 만들며, 자그마한 눈뭉치를 만들어 던진다. 어린 마음을 가진 아이가 신나게 뛰어논다.
캐럴 소리를 키워본다. 잃어버렸던 아이가 신나게 놀 수 있도록 자리를 내어준다. 크리스마스가 아니더라도, 캐럴로 아이를 불러내야겠다. 어른이라는 굴레를 잠시 옆에 둬야겠다. 신나게 놀아보라고, 마음에 있던 아이에게 기회를 자주 주고 싶다.
덧붙임
모두 미리 메리 크리스마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