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한건 나뿐이더군요.
내게는 몇 해의 벚꽃이 남았을까?
꽃이 피는 봄을 참 싫어했다. 대학원 때 내내 그랬고, 회사를 다니면서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날씨가 화창하고, 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날에는 더 짜증이 났다. 지금 곰곰 생각해 보면, 우습다. 대학원 시절도, 회사생활도 여유를 가지기 여러모로 힘들었던 모양이다.
시간의 대부분은 실험실에 있어야 하고, 늘 적어야 한 논문, 보고서, 계획서가 있다. 쉬는 날도 쉬지도 못하고 늘 쫓기듯 한다. 일을 하기라도 하면 되는데, 그저 마음만 불편하며 쉬니 여유 따위는 없다. 쉬지도 못하는 판에 노는 건 말도 안 된다. 스스로를 그렇게 옭아맸다. 그래서 화창한 날씨에 꽃이 피면 나가지 못하는 스스로를 보며 짜증을 냈다.
또 하나 더하라면, 비교 때문이다. 대학원생으로 칙칙하게 있는 모습과 이제 막 새로 들어온 새내기의 격차도 한 몫했다. 나는 놀지 못하는데, 노는 친구들이 앞에 왔다 갔다 하는 건 생각보다 고통스럽다. 비유를 해볼까? 다이어트 중인 내 앞에 치킨, 족발, 국밥, 파스타, 피자가 고소한 냄새를 진동하며 앞에 있다고 생각해 보자. 얼마나 짜증이 날까? 대학원을 졸업하고 회사에 있는 일도 별반 다르지 않았다. 늘 바빴고, 꽃이 피든 말든 상관없었다.
그럼 지금은? 변했다. 상황이 바뀌었을까? 그건 아니다. 최근 대구를 다녀왔다. 일정도 벚꽃이 활짝 핀 시기랑 겹쳤다. 계획을 한 달 전에 잡은 터라, 노렸다. 비가 오지 않길 바랐고, 너무 빨리 지지 않길 기도했다. 내가 뭐라고 기도에 응답하셨을까 만은 정말 시점이 좋았다. 벚꽃은 활짝 폈고, 바람이 불면 떨어지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수성못. 큰 호수를 둘러 사람들은 거닌다. 몇몇은 신발을 손에 든 채 다닌다. 맨발로 걷기에도 충분한 흙길이 나있다. 길을 따라 벚꽃이 늘어서있으니, 꽃비를 맞는 영광까지 얻을 수 있었다. 사람들이 북적거렸고, 그들과 함께 꽃길을 걸었다. 비유의 꽃길이 아니라, 정말 꽃길.
다음 꽃길은 경상감영공원에서 만났다. 밥을 먹고 시간이 남았다. 지도를 열어보니 작은 공간이 눈에 띄었다. 우연하게 만난 그곳. 한갓진 그곳에는 사람이 없었다. 환한 햇살을 받으며 걷다 멈춰 자리에 앉았다. "내게는 몇 해의 벚꽃이 남았을까?" 누구도 답을 알 수 없는 일이다. 지금 기대수명을 생각해 보면 50년? 운이 좋다면 더 길게 남았을 테고, 두 어 번만 남았을 수도 있을 테다.
또, 그냥 시간의 흐름만 느끼고, 특별한 일이 아니라 그저 열매를 맺거나 여름으로 유전자를 운반하는 단순한 기계적인 일이라 할 수 있다. 언어라를 상징체계를 통해 의미 없는 것에도 의미를 붙이며 살아가는 인간이 못할 일은 무엇이랴. 꽃이 피는 날에 의미를 덕지덕지 붙여 본다.
짜증을 내던 대학원 시설, 회사에 출근하던 날들과 지금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같은 봄을 보고, 꽃을 보는 일이 참 다르다. 무엇이 달라졌을까? 변한 건 다른 무엇도 아니고 나다. 몇 번의 벚꽃이 내게 남았는지 알 수 없다. 의미가 없다고 할 수도 있다. 그렇다 하더라도 이제는 이 날을 온전히 느끼는 일이 소중하다.
매년 순환하는 날들에 의미를 부여한다. 내가 살아있기에 느낄 수 있다고. 여유는 오는 일이 아니라, 내가 마음을 먹으며 틈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유한한 내 삶이기에, 화려하게 피고 이러지는 벚꽃이기에, 나만의 의미를 부여하며 살아가고 싶다.
다음 벚꽃 시간은 내게 올까? 온다면, 난 또 어떤 의미를 짚어가며 살고 있을까? 그 해의 벚꽃이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