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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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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Sep 06. 2024

새로운 모양의 사랑



남편이 종아리 파열로 꼼짝하지 못하고 있다. 절대 움직이면 안 된다는 의사의 말에 회사도 당분간 쉬게 되었다. 침대 위에서 무료한 하루를 보낸 남편은 오늘은 아침부터 영화를 봐야겠다며 거실로 나왔다. 오전 내내 늘 조용했던 집이 웅장한 음악과 대사 소리로 인해 시끌벅적해진다. 부엌 테이블과 소파 옆 책상이 나의 글쓰기 공간인데 어쩌지 싶었다. 남편에게 글을 써야 하니 비켜달라고 하기엔 영화를 보는 얼굴이 즐거워 보인다. 게다가 조금 있으면 점심 메뉴를 미리 고민해야 한다는 부담감까지 생겼다. 끝난 줄 알았던 여름방학이 새로운 버전으로 돌아온 느낌이랄까. 

     

오전에는 글쓰기에 집중하기로 한 다짐을 지키고 싶어 일단 귀에 이어폰을 꽂고 최대한 멀리 떨어져 앉아 노트북을 열었다. 거실 테이블에 앉아 글을 쓰다 보니 한 공간 안에서 철저히 분리된 두 사람이 공존하는 것 같다. 남편은 영화를 보고 나는 글을 쓴다. 예전의 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모든 것을 같이 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맛있는 것을 같이 먹고, 재미있는 것을 함께 하고, 일상의 시시콜콜한 감정들을 나누는 과정이 사랑이라 믿었다. 이제는 안다. 점심 메뉴쯤 각자 먹고픈 걸로 따로 먹어도 아무 문제없으며 같은 공간에서 아무 말 없이 몇 시간을 각자 보내도 괜찮다는 걸. 서로의 시간과 취향을 존중하는 것 또한 사랑임을 알게 되었다.

     

SF 영화를 좋아하는 남편과 잔잔한 영화를 좋아하는 내가 함께 볼 수 있는 영화는 마블시리즈가 유일하다. 족발을 좋아하는 남편이 매운 양념이라면 사족을 못쓰는 나를 위해 반반 메뉴를 주문하는 것도 일종의 배려다. 서로의 접점을 세심하게 관찰하고 기억하는 것이 바로 사랑하는 이와 긴 인생을 함께하는 방법이 아닐까. 사랑의 형태는 함께한 시간의 길이와 깊이만큼 달라진다는 걸 배운다. 가족이자 삶의 동반자이자 서로가 서로에게 가장 웃긴 친구인 우리. 남편과 나는 새로운 모양의 사랑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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