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수첩 하나를 아이에게 선물했다. 내가 평소에 메모를 하거나 글을 쓸 때 사용하는 베이지색 노트다. 딸은 요즘 글쓰기에 푹 빠져 있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동물을 사랑하는 아이는 최근 <시튼 동물기>와 <눈과 보이지 않는>이라는 책을 감명 깊게 읽었다. 이후 동물이 등장하는 몇 개의 이야기를 쓰고 있다. 단편소설 모음집 같은 느낌이랄까. 하나의 글을 완성할 때마다 뿌듯한 얼굴로 내게 수첩을 건넨다. 어떤 이야기를 썼을지 궁금함과 동시에 대견함이 밀려온다. 저 조그만 손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다니. 책장 앞에 쪼그리고 앉아 그림책을 보던 아이가 어느새 자란 모습을 보며 결국 감동하고 마는 것이다.
엄마가 글 쓰는 모습을 보고 자라서일까. 딸은 나를 따라 종이나 수첩, 노트북 속 한글 프로그램과 아이패드 메모장에 글을 쓰곤 했다. 처음엔 17줄 학교 공책에 연필로 글을 쓰기 시작하다가 최근엔 내 수첩과 펜을 가져다 끄적이고 있다. 엄마가 쓰는 노트가 딱 마음에 든다길래 하나 꺼내주었다. 틈날 때마다 노트를 열어 글을 쓴다. 아이는 한번 펜을 잡고 쓰기 시작하면 멈추지 않는다. 자신이 생각해 둔 어떤 그림이 있는듯했다. 아이와 이야기가 만나는 순간을 지켜보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묵묵히 글을 쓰는 것도 대견한데 무궁무진한 이야기를 거침없이 종이 위에 펼치는 모습이 놀라웠다. 이런 단어와 표현을 알고 글로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했다. 아이 몸 어딘가에 이야기 주머니가 매달려 있는 게 분명했다.
“어떻게 이런 글을 쓰는 거야, 정말 대단하다! 엄마는 절대 못쓸 거야. 멋지다, 우리 딸.”
내가 감탄할 때마다 아이는 배시시 웃는다. 누군가 자신의 글을 읽어준다는 간질간질한 기쁨에서 나온 행복한 미소였다.
처음엔 아이가 글을 쓸 때마다 마음이 덜컹거렸다. 이러다 작가가 되고 싶다 하면 어쩌지 괜히 걱정이 되었다. 글을 쓰는 게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지 잘 알기 때문이었다. 책을 사랑하고 부지런히 읽다 보면 결국 글을 쓰고 싶어 지는 건 어쩌면 당연한 과정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놔둬도 될까 고민한 것도 사실이다. 우리는 너무 닮아 있었다. 내가 어릴 때부터 읽고 쓰는 아이였던 것처럼 딸도 마찬가지였다. 읽고 쓰는 기쁨을 사랑하는 우리. 그 마음을 가장 잘 아는 내가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이가 쓰고 싶은 이야기들을 마음껏 종이 위에 쏟아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을 주기로 했다. 묵묵히 지켜보기로 마음먹었다.
아이의 이야기는 자유롭고 아름답다. 반짝이는 햇살 같기도 하고 넓게 펼쳐진 평화로운 초원 같기도 하다. 글에서 거대한 자연이 느껴지는 이유는 딸이 동물과 자연을 너무나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글에는 쓰는 이의 모든 게 묻어 나온다는 사실을 아이의 글을 읽으며 또 한 번 깨닫는다. 반대로 나의 글을 되돌아보게 된다. 나는 어떤 글을 쓰고 있나. 어떤 마음과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나. 읽는 이에게 의미 있는 글인가. 정성을 다한 문장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 동그란 테이블에 마주 앉아 글을 쓰고 있다. 동글동글한 글씨와 아기자기한 그림으로 자신만의 이야기를 써 내려가는 표정이 사랑스럽다. 귀여운 동물 그림을 곁들인 아이의 글 하나가 완성되었다. 그 완성의 순간을 지켜보며 나의 글도 마무리되었다. 우리의 주말 오후가 끝나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