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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작은 수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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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현수진 Sep 20. 2024

기분이 꼭 늘 좋을 필요는 없으니까



기분이 좋지 않아 일단 밖으로 나왔다. 이른 시간이라 도서관 제일 구석 명당에 일찌감치 자리 잡을 수 있었다. 쓰다만 글을 마무리하고 책을 집어 들었으나 글자가 영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아이패드와 키보드를 가방에 넣고 다시 밖으로 나왔다. 오늘은 아침부터 비가 온다. 멈출 생각이 없는 기세로 비가 쏟아진다. 오늘 내 기분에 걸맞은 날씨라 생각하며 추적추적 걸었다. 카페에 들어와 시원한 라테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글을 쓴다. 마침 마음에 드는 음악이 흐른다. 클래식 곡을 재즈풍으로 편곡한 연주곡이 나오고 있다. 리듬에 맞춰 나도 글을 쓴다. 박자를 타듯 내 기분도 오르락내리락한다. 좋아질까 말까를 고민하듯. 내가 기분을 바꿀 수 있는 방법은 이 정도뿐이다. 걷거나 장소를 바꾸거나 글을 쓰거나 커피를 마시거나 혼자 있는 것.


건너편에 앉은 여자가 불안한 손동작을 반복하고 있다. ‘아이,씨’라는 낮은 탄식이 새어 나온다. 나 말고 기분이 좋지 않은 사람이 또 있구나. 커피를 한 모금 입에 머금고 있다 꿀꺽 삼킨다. 커피 맛을 온전히 느끼고 싶을 때 하는 버릇이다. 문을 열고 누군가 들어온다. 자리에 앉은 여자를 향해 손을 흔든다. 일행이 자리에 앉자마자 ‘아니, 내가 있잖아’를 시작으로 기분이 좋지 않은 이유를 장황하게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녀는 곧 기분이 풀릴 것이다. 인간은 혼자 일수 없다. 독립적일 수 없는 나약한 존재다. 마음을 기댈 사람이 없으면 기분 하나 조절하기 쉽지 않으니까. ’아니, 왜. 무슨 일인데’하며 또 다른 일행이 문을 열고 소란스럽게 합류한다. 셋은 얼굴을 맞대고 비밀스럽게 무언가를 속삭인다. 부럽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금 내 주변엔 저런 식으로 기댈만한 사람은 없다. 언젠가는 분명히 있었지만 멀어졌거나 사라져 버렸다.


그나마 내게 남은 몇 개의 위로들. 읽거나 쓰거나 걷거나 커피를 마시거나를 반복하며 나를 달랜다. 어떤 날은 잘 통하지만 때로는 전혀 괜찮아지지 않는다. 기분과 감정들은 어디로 사라지는 걸까. 아마 사라지지 않고 죄다 쌓여 있을 것이다. 커피를 마시고 나니 조금 괜찮아졌다. 기분을 10으로 표현하면 2 정도만 괜찮아지고 나머지 8은 걸러지지 않은 찌꺼기처럼 굳어 있는 것 같다. 기분이 태도가 된다던가 긍정적인 생각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들은 죄다 잔소리 같다. 유한한 삶을 살며 지지고 볶고 기분이 좋지 않고 화내고 싸우는 일들이 죄다 무용하다는 건 잘 알고 있지만 어떤 날은 그냥 기분이 좋지 않은 채로 있어도 되지 않을까. 오늘은 내게 그런 날이다. 기분을 있는 그대로 놔두고 싶은 날. 살면서 그런 날도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무채색이 아닌 변화무쌍한 다양한 색을 가진 사람으로 존재할 수 있을 것이다.


빗방울이 땅에 떨어지는 모습을 멍하니 쳐다보다가 문득 내가 왜 그렇게 기분이 나빴는지를 생각하니 다시 기분이 안 좋아졌다. 아, 나는 별로 기분을 풀고 싶지 않구나. 그래서 그냥 두기로 했다. 기분이 나아지도록 억지로 노력하지 않고 최대한 나를 위해 시간을 보내기로 한다. 기분이 좋지 않더라도 글은 쓸 수 있고, 커피는 여전히 맛있고, 읽을 책이 몇 권 도서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니 그걸로 되었다 생각하면서. 그냥 어리석게 굴고 싶은 날도 있는 거라 위안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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