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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승아 Oct 31. 2016

슬럼프 혹은

균열

주변에서는 슬럼프라고, 여태 (잘) 그래왔듯 다시 털고 잘 할 거라고, 다만 이번에 그게 좀 긴 것 같다고 했다. 슬럼프일까? 과거엔 그랬다. 나 지금 슬럼프라고 단정지어 말할 수 있었던 상태. 슬럼프.


스무 살이 넘은 때를 기점으로, 기자가 아닌 다른 직업을 가진 나를 상상해본 적이 없었다. 당연히 기자가 될 거라고 생각했고 당연히 그것을 제외하고는 어떤 것도 한눈을 팔아본 적이 없다. 잠깐 다른 일들을 할 때도 그건 그저 언젠가 기자가 될 나의 미래를 위한 일이었고, 심지어 국회에서 보좌진으로 일할 때 조차도 내 꿈은 기자였고, 언젠가 머지 않은 때에는 보좌진이 아니라 출입기자로 여길 올 거라고 생각했다.


어떤 것에도 의존하지 않고 대학교 안에서 언론고시반에서 준비했던 학부생 때를 돌이켜보다가, 이제는 회사를 다니면서 후회 없이 준비하려면 도저히 안되겠다 싶어 그때도 안 했던 이것 저것을 했다. 남은건 회사와 병행하기에 만신창이가 된 몸뚱아리고, 한때 가장 가고싶었던 회사에서 또 한 번 최종에서 떨어졌다. 물론 여기는 다른 언론사와 조금은 달라서 내가 회사에 다니느라 공부가 부족해서 떨어졌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지만 여튼 그랬다. 회사를 다니면서도 뭔갈 이뤄낼 수 있다고 생각했고, 지금의 회사는 내게 오로지 그 전에 거쳐가는 곳이라고 생각했던, 꼭 합격해서 여길 벗어날 거라고 생각했던 그 마음조차도 와장창 깨져버렸다.


생각보다 힘들지 않았다. 사실 이미 최종에서 두어 번 탈락했던 회사였고, 번번히 뭔가 나를 안타까워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예전엔 왜 내가 아닌지 고민했다면 이제는 그냥 사람 뽑는 일이 다 그렇지 뭐, 다들 합리적인 선택으로 배우자를 고르는 게 아니니까, 인연이 닿지 않은 것과도 같은 맥락이니까, 라고 생각해서 별로 힘들지 않았다. 다만 기자가 아닌 상태로 계속 나와 전혀 맞지 않는 회사를 다니면서, 체력과 정신력을 모두 고갈해가면서 점점 내 스스로를 갉아먹는 데 너무 지쳤다. 정말 너무나도 많이 지쳤고, 당장에 이 회사를 그만둘 기회가 아주 가까웠던 기회가 사라졌다는 것에서 오는 엿같음이 더 컸다.


나는 여전히 기자가 되고 싶은 걸까. 어쩌면 그 조금 전부터 그런 고민을 했다. 솔직히 말하면 마음 속에 다른 선택지가 없기도 했다. 늘 언론사의 아주 가까운 문턱에서 여러 번 뒤돌아야했고, 차라리 그게 아주 먼 단계였다면 이미 쉽게 포기하고도 남았을 일을 그래서 포기하지 못하기도 했다. 다른 형태의 많은 미디어의 탄생과 성향 상 그런 일들을 즐겁게 만들어나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도권 언론의 시험을 꾸준히 치르고 아등바등 살았던 이유다. 나는 여전히 기자가 되고 싶은 걸까.


최근에 같이 공부하던 오빠가 첫 시험만에 국내에서 손꼽는 언론사에 합격했다. 워낙 똑똑하고, 열심히 하던 사람이라 당연히 금방 붙을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원샷 원킬까지 할 줄은 몰랐다. 그래도 내공이 탄탄한 사람이라 시험 세 번 안에는 분명 합격할 것 같았었다. 너무 축하하고 덩달아 기뻤다.


신기한 건 부럽지가 않았다는 거다. 오빠야 그렇다 치지만 이전엔 나보다 조금 어리거나, 더 좋은 학교를 나왔거나, (양적으로) 더 똑똑하거나(똑똑해 보이거나), 이건 좀 찌질한 거긴 한데 많이 예쁘면 참 부럽고 질투가 나고 화도 났다. 왜 나는 (이제는) 어리지도 않고, 더 좋은 학교를 못 나왔으며, 더 똑똑할 노력을 안 했고, 더 예쁘지 않은지. 사실 나도 최종 면접자 중 가장 어렸던 해가 있었고 그땐 참 총명했던 것 같은데 지금은 그때의 총명함도, 패기도 없지 않나, 심지어 그때보다 나이는 먹었고 여전히 예쁘지도 않다. 그런데 참 부럽지가 않은 거다.


그렇게도 내가 원하던 일을 이룬 사람이 하나도 부럽지 않다는 건, 어쩌면 이젠 더 이상 그걸 원하지 않는다는 걸까. 경계의 삶도, 늘 치열하게 살아내는 것도, 늘 무언갈 바라는 것도 이제는 좀 지친다. 이거 정말 슬럼프가 맞는 걸까. 난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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