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히 갑에게 무언갈 기대하고 요구하는 순간부터 카운트다운은 시작된다
무탈해보이던 친구의 연애가 잠시 삐그덕 거린 며칠, 친구의 답을 정해둔 고민들을 듣다가 황망하게 산산조각났던 그 언젠가의 내 관계가 떠올랐다. 연애라고는 당연히 이름붙일 수도 없었던, 나만 비참했던 관계. 사실 불현듯 떠올랐다고 하기엔 내 인생에서 꽤 큰 사건이었고, 여전히 꿈에도 종종 나타날 정도로 트라우마가 되어버린 시간이지만, 여하튼.
안주거리처럼 요즘도 종종 잘근잘근 씹어내곤 하는데, 그럴 때는 꼭 그가 얼마나 재수없는 놈이었는지만 말하게 됐다. 그런데 아주 가끔, 이렇게 곰곰히 곱씹어보면 그때 그가 얼마나 잔인했는지, 그 관계가 얼마나 나에게 가학적이었는지가 생각난다. 당연히 안 지킬 것이 뻔했던 약속들과, 그러면서도 기대하게 했던 말들, 말도 안 되게 따뜻했던 눈과 말, 돌아설 땐 서늘해지던 표정, 아마도 그 자리를 떠나서는 내 생각을 하지도 않았을 시간들.
'왜 지금의 남자친구와 헤어지고 나를 만나지 않느냐'고 묻던 그는 그런 식으로 나를 잠식해갔다. 갑을이 전복되던 순간이었다. 그렇게 비참한 시간을 겪으면서도 그 자체로도 좋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건 그냥 버틸만 했기 때문이었다. 힘들다고 말하면서도, 그냥 버틸만 했기 때문이었다.
을의 연애. 문서화된 계약보다 관계에 있어서의 갑을은 그래서 더 잔인하다. 을이 '감히' 갑에게 무언갈 기대하고 요구하는 순간부터 그 관계가 끝날 카운트다운은 시작되게 마련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 번 쯤은 그런 관계를 겪어봐도 좋다고 여기는 이유는, 내 마음도 내 맘대로 안 되는데 남의 마음까지 내 마음대로 하고싶어하는 오만함에서 벗어날 기회라는 것. 그리고 '갑을'이라는 말도 안 되는 관계계수를 부여하지 않아도 될 감사한 관계를 비로소 받아들일 준비가 됐다는 뜻이기 때문일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