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로운 건망증

꼭, 나쁜건 아니라구요

by 조승현

'평화로움'을 정의하기란 꽤 어렵지만, 꼭 한 장면이 떠오른다. 아침을 간단히 먹고 말끔하게 씻은 뒤, 햇살이 내리쬐는 테라스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책을 읽는 것이다. 커피+책은 열시간의 비행도 거뜬히 견디게 한다.

커피와 책의 궁합은 그 정도로 막강한 행복을 만드는데, 이따금 건망증이란 녀석이 툭 튀어나와 방해하기도 한다. 책 속에 퐁당 빠져서는 그만 커피를 잊는 것이다. "아차! 커피!"하고 잔을 내려다보면 이미 늦었다. 식어버린 커피는 맛과 분위기를 모두 잃은 뒤다. 그럴 때면 무언가 단단히 손해 본 느낌이 든다. 건망증은 이런식으로 종종 허락 없이 삶속에 껴든다.

4년 전쯤 친구와 뉴욕에 머문 적이 있다. 함께 여행하기에 편의상 공금을 모았는데, 왜 그랬는지 내가 공금을 관리했다. 아니다 다를까, 이틀이 채 지나지 않아 공금을 잃어버렸다. 주머니에 곱게(?) 넣은 200불이 사라진 것이다. 울상은 제 있을 곳을 찾은 듯 내 얼굴로 달려들었다.

"난 분명히 주머니에 넣었어!, 돈이 스스로 탈출한 게 분명하다고!" 항변했지만 먹힐 리 없었다. 단단히 화가 난 친구는 30분간의 잔소리와 모욕을 쏟아붓고는 "아휴 진짜! 너 지갑 내놔, 내가 관리할 테니" 하고 내 지갑과 남은 현금을 모조리 압수했다. 내겐 선택권이 없었다. 그리고 그날, 친구는 지갑과 현금을 몽땅 잃어버렸다.


친구의 얼굴은 가관이었다. 오렌지와 당근을 지나 빠알간 파프리카 같은 얼굴을 해서는 분주히 지갑을 찾았다. 우사인 볼트에 빙의해 거리를 누비다가도, 바둑을 둘 때처럼 장고를 거듭했다. 부끄러움과 당황스러움이 덕지덕지 얼굴에 붙었다. 30분쯤 지났을까, 결국 분실을 인정한 그는 수줍게 서서 말했다.


"미안... 잃어버렸어..."

"그럴 수도 있지 뭐, 여권은 안 잃어버려서 다행이야!"


결과부터 말하자면, 나는 별말을 하지 않았다. 무언가를 잃어버린 기분을 아주 잘 알아서였다. 뭐, 그럴 수도 있지 해버렸다. 친구에게 먹은 30분간의 잔소리는 건망증에 흩어진 지 오래였다. 친구는 내 건망증에 감사해했다. 적어도 30분씩 30번은 더 비아냥을 살 줄 알았다고 했다. 무언가를 잊는다는 것은 재앙이 되기도, 너그러움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그날의 기억은 왜 잊혀지지 않을까?


서울로 돌아오는 시애틀 공항에 앉았다. 따스한 햇살이 비치는 공항 라운지가 독서를 유혹했다. 비행까지 두 시간 정도 남은 때였다.

벤티 사이즈로 시킨 커피를 잊지 않으려 덮개를 미리 열었다. 테이블 위에서 은은히 커피 향을 뿜어내며 코 밑을 자극했다. 이따금 커피를 한 모금씩 들이키며 생각했다. '커피를 잊지 않아서 참 다행이야.' 잊지 않고 커피를 마셨다는 것에 행복이 피어올랐다. 그럴 때면 건망증 인생도 뭐 그리 나쁘지 않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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