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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승현 Sep 01. 2017

아이들의 음을 배우기위해, 다시 책상에 앉다.

  처음에는 ‘그냥 하다 보면 어떻게 되겠지’ 하고 생각했다. 천문학을 전공하고, 초등학생에게 우주를 가르치는데 어려움이 있을까 싶었다. 하지만 대학에서 배운 프로 천문학과, 아이들에게 전달된 아마추어 천문학은 하늘과 땅 차이었다. 스피드 스케이팅과 피겨스케이팅의 차이만큼이나 달랐다. 결국 ‘공부’가 필요했다.

 별자리를 알아야 했고, 언제 어디에서 행성과 달이 뜨고 질지도 알아야 했다. 장사정포 같은 엄중하고 뜬금없는 질문의 답도 자연스럽게 떠올라야 했다. 밤하늘과 30년을 같이한 어느 강사는 질문 하나에도 지금의 밤하늘과 어떻게 연결시킬 수 있을지, 어디에서 재미를 주어야 할지 가늠하는데 1초면 충분하다고 했다. 처음엔 웃었지만 아이들과 만나다 보니 그것은 절대로 과장이 아니었다. 강사란,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는 직업이었다.        


  

 오후 3시부터 12시까지 9시간을 일한다고 칠 때, 수업하는 시간은 평균 3시간 정도였다. 나머지 5시간은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이었다. 수업하는 시간보다 수업을 준비하는 시간이 오히려 길었다. 그렇다 해도 갓 대학을 졸업한 내게 쌓아진 시간이라곤 채 몇 시간이 되지 않았다. 충분한 시간이 흐르기 전 까진, 대학 때 배운 지식으로 모든 것을 답해야 했다. 

 하지만 나는 별보다 물리, 수학 문제를 더 많이 본 인간이었다. 조약 한 지식은 가뭄난 강바닥처럼 메말랐다. 아이들의 질문을 받으면 어떻게 설명해야 이해할 수 있을까?, 고민하는 사이 아이들의 흥미도 곧 사라져 버렸다. 모든 질문은 답지를 잃어버린 문제와 같았다. 올바른 답을 찾아낼 수 없었다. 그래서 얼마간 어려운 대로 답했고 수업은 흥할 리 없었다. “선생님 쉬는 시간은 언제예요?” 하는 원성이 콕콕 양심을 찔렀다.     

 한 번은 ‘상대성 이론을 어떻게 증명했어요?’ 하는 6학년 아이의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 나는 ‘아니 그런 질문을?’ 하고 반가워하며 수학적으로 증명을 시작했다. 속도 공식을 통한 간단한 증명이었지만, 아이의 눈에선 당혹감이 흘렀다. ‘괜히 물어봤다’ 싶은 후회와 ‘왜 그런 걸 물은 거야..’하는 주위 아이들의 야유가 강의실을 휘감았다. 안 되겠다 싶어 “너네들에겐 조금 어려우니까 다음번에 알려줄게” 하고 상황을 무마했지만 때는 이미 늦었다. 김연아 선수가 올림픽에서 은메달을 땄을 때와 같은 정적이 교실에 깔렸다.

 쉬는 시간이 되어 교실을 나서는데 뒷 머리로 “야 이제 질문하지 마” 하고 아까 그 친구를 다그치는 소리가 들렸다. 미안함과 자책감이 가슴에 몰아쳤다. 이런 일을 겪을 수도 있지, 애써 자책하고 말았지만 쉽사리 잊히지 않았다. 그날 밤 꿈에 12명의 아이가 합창하듯 말했다. “질문하지 마, 질문하지 마, 절대 질문하지 마”   


  

 그래서 나는 책상에 앉았다. 나를 위해서도, 아이들을 위해서도 우선 ‘공부’가 필요했다. 그때 나는 ‘천문학을 전공했는데, 아이들이야 식은 죽 먹기지' 하는 가벼운 태도를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모든 길에는 저마다의 음이 있다. 그것을 익히지 않으면 쉽게 불협화음이 나서 들을 수 없게 된다.

 작년까지 물리를 풀던 책상에 앉아 이제는 아마추어 천문학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교수님에게 받아온 평가가 이제는 아이들 손에 쥐어졌다. ’ 별자리는 대학 때 안 배웠는데?‘ 하는 것이 핑계가 될 리 없었다.     

 그리스 로마 신화를 글과 만화 양방향으로 섭렵하고, 신들의 가계보를 그리기도 했다. 모든 지식을 물리와 수학이 아닌 말과 그림으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더듬더듬, 아기가 손을 어딘가에 딛고 일어서는 것과 같았다. 몸을 의지하던 손을 떼는 일은 쉽지 않았다. 고등한 지식에 기대어 자만하고 자신했던 수준이 어린아이들 수준에 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 깨어진 사이로 이상한 쾌락 같은 것이 느껴졌다. 아이들의 웃음이었다. 

 

새로운 음을 익히는 일은 즐겁다. 여러 음이 적당히 하모니를 이뤄간다. 그것은 아이들 질문의 답이기도 하고, 즐거움이기도 하고, 우주이기도 하다. 화음들을 이어 하나의 노래가 되고 나면 나름 강사로서의 화성을 떼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단순히 지식을 외우고 재미를 계산하는데서 나아가 ‘아이들’에 대해 상상하게 된다. 어느 색의 별을 품는지, 얼마나 거대한 우주를 품는지, 하는 것이다. 생존을 위한 공부는 그러한 사유로도 깊어진다. 그렇게 쌓아간 삶의 화음은 강사로 살아갈 주체와 감각으로 남을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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